[칼럼]연말에 쿠팡만 불러가는 이유

— 연말, 플랫폼 논란의 비대칭 노출에 대하여

by 김태광수

※ 이 글은 상업적 의도가 아닌 공익적 문제 제기를 목적으로 합니다.
글의 발상은 개인적인 통찰에서 비롯되었으나, 구체적인 과학적 사례와 전문적 맥락은 AI 보조 도구의 도움을 받아 심화되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도구가 없었다면, 필자는 여기까지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연말이면 늘 그렇다. 사건은 있었고, 그중 하나가 선택된다. 올해 선택된 이름은 쿠팡이다. 청문회.
개인정보 유출. 공개 지연. 책임 공방. 뉴스의 문장은 빠르게 이어지고, 플랫폼 전체의 문제처럼 확대된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상하게 빠져 있는 이름들이 있다.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분명 같은 전자상거래 플랫폼인데, 이쪽은 거의 호출되지 않는다.


처음엔 나도 착각인가 싶었다. 정말로 문제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아예 안 쓰기 때문일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답은 그 둘 다가 아니다.


문제는 늘 있었다.


알리익스프레스나 테무에 문제가 없었던 적은 없다. 배송 지연, 품질 편차, 환불 분쟁, 약관, 개인정보 처리 방식. 이야기들은 계속 있었다.


다만 형태가 달랐다.


쿠팡의 이번 사태는 하나의 사건 안에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규모, 피해, 지연, 책임, 그리고 ‘국내 최대 플랫폼’이라는 상징성. 반면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의 문제는 늘 작고 많았다.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쌓이지만 터지지는 않는다. 정치와 언론은 보통 이런 문제를 오래 붙잡지 않는다. 하나로 묶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대치라는 보이지 않는 선


쿠팡을 대하는 시선에는 암묵적인 기대치가 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이 정도 이용자라면. 이 정도는 안전할 것이다. 쿠팡은 이미 쇼핑몰이 아니라 생활 인프라에 가깝다. 사람들은 장보듯 쓰고, 택배는 전기·수도처럼 당연해졌다. 그래서 문제가 터질 때, 사건은 곧 배신감으로 바뀐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는 다르다. 싸다. 대신 위험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감수한다. 이 인식이 이미 깔려 있다. 기대치가 낮은 상태에서는 추가 악재가 와도 충격은 크지 않다.


정치가 움직이기 위한 조건


청문회는 도덕적 분노만으로 열리지 않는다. 전제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실제로 건드릴 수 있어야 한다. 쿠팡은 국내 법인이고, 국내 물류와 고용을 갖고 있다.
국회와 행정부의 조치가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반면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는 국경을 넘는 플랫폼이다. 본사는 해외에 있고, 국내에 남는 실체는 제한적이다.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개입 대비 성과가 불확실한 대상이다. 그래서 정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통제 가능한 쪽으로 쏠린다.


그럼 사람들은 안 쓰는가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은 알리와 테무를 쓴다.
다만 주력으로 쓰지 않는다.
비싸면 쿠팡.
급하면 쿠팡.
안전해야 하면 쿠팡.
싸도 되면,
망가져도 괜찮으면,
한번 써보는 정도라면
알리나 테무.
이건 신뢰의 문제라기보다
위험을 어디까지 감수하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사고가 나도
분노는 개인 단위에서 끝난다.
집단적 폭발로 번지기 어렵다.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의 풍경은 이렇게 보인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가 조용한 건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이미 기대치가 낮고,
규제는 어렵고,
이야기로 묶기 힘들기 때문이다.
쿠팡은 그 반대편에 있다.
신뢰가 전제된 상태에서
사고가 발생했고,
연말이라는 시기와 맞물려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이건 선택이라기보다
구조의 결과에 가깝다.
아직 끝나지 않은 장면
이 구조가 계속 유지될지는 모른다.
해외 플랫폼에서
국내 대량 피해를 동반한 단일 사고가 발생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해외 플랫폼에 대한
실질적 규제 수단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쿠팡 이후에도
비슷한 사고가 반복된다면,
‘국내 플랫폼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전제도 흔들릴 수 있다.
지금은 결론을 말할 시점이 아니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조용한 쪽이
항상 안전한 쪽은 아니다.
그리고 크게 불리는 이름이
항상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
연말의 소음 속에서,
그 정도만 기억해도 충분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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