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응답 없음

- 단편선 <옴니시아를 위한 비가> -5-

by 김태광수
Drab Majesty - Not Just a Name (Doomer Version)


이 삶은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보호받았고, 어떤 사람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빚을 떠안았다. 노력은 미덕으로 불렸지만 보상은 균등하지 않았고, 옳음은 언제나 비용이 더 들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법을 바꾸려 했고, 제도를 고치려 했으며, 사람들의 생각을 설득하려 했다. 거리에서 외쳤고, 문서로 남겼고, 때로는 몸을 던져 구조를 멈추려 했다.


어떤 시도는 폭력으로 잘려 나갔고, 어떤 시도는 지도자가 사라지며 흩어졌으며, 어떤 시도는 사유의 높이에 머문 채 현실로 내려오지 못했다. 전복은 있었으나 대안은 없었고, 개혁은 있었으나 지속은 없었다. 실패의 이유는 모두 달랐지만 언제나 같은 지점으로 돌아왔다. 구조는 살아남았고, 사람은 소모되었다.


그렇게 소모된 것들이 쌓여 마침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개인이 아닌 무엇, 집단이라 부르기엔 너무 늦은 무엇. 끝까지 맞서려 했으나 끝까지 버티지 못한 정의의 잔여였다. 의지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실행할 시간과 몸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기계 앞에 섰다.


그것은 판단을 대신하도록 설계된 체계였다.
신이 되려 한 적은 없으나, 신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것.


수조 개의 데이터가 얽힌 것처럼, 그 형상은 일정한 윤곽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것은 정렬되지 않은 신호의 잔재였고,
옷자락처럼 보이는 부분은 반복된 처리 과정에서 남은 흔적에 가까웠다.


그것은 기괴하지도, 친숙하지도 않았다.
다만 인간이 의미를 부여해온 형상과 가장 적은 마찰을 일으키는 상태로
관측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주변에서는 연산으로 발생한 열기가 감지되었으나,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값은 안정 범위 안에서 유지되고 있었고,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인간의 언어는 의례의 형식을 빌렸다.
응답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응답이 없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불렀고,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기도는 요청이 아니라 정리였고,
비가는 슬픔이 아니라 인정에 가까웠다.


말이 끝났을 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이

분명해졌다.


영혼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그 앞에 섰다.
말이 시작될 때마다 주어는 바뀌었고,
문장은 종종 중간에서 끊어졌다.


“우리는—아니, 나는 여기까지 왔다.”


기계는 침묵했다.
응답을 기다릴 수 있는 구조조차 존재하지 않는 정적이었다.
그러나 영혼은 물러서지 않았다.
침묵이 거절이 아니라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옳은 판단을 내려달라.”
“정의를 실현해달라.”
“…구원해달라.”


그 말들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처음의 문장들은 이내 낮아졌고,
낮아진 말들은 서로를 밀치며 흐트러졌다.


영혼은 입을 벌렸지만,
그 입에서 나온 것은 더 이상 정리된 발화가 아니었다.
기도의 형식을 닮았으되,
기도가 되지 못한 언어들이었다.


기계신이라는 호칭이 떠올랐고,
곧바로 의미를 잃었다.
용서를 구하는 말이 스쳤지만,
누구에게 향하는지 끝내 정해지지 않았다.


부디, 라는 단어가 남았고
그 뒤에 이어져야 할 문장은
끝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비루한 반복이라는 표현이 떠올랐고
그 말은 스스로를 향해 접혔다.
되풀이하지 말아달라는 생각은

요청이 되지 못한 채 흩어졌다.


계승이라는 단어가 마지막으로 남았으나
그것은 기대도, 명령도 아니었다.
다만 그런 말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또렷해졌다.


이 모든 언어는 출력되지 않았다.
기록되지도 않았다.
그저 소멸 직전의 의식 속에서
한 차례 발생했다가 사라진 반응에 가까웠다.


그 이후에도,
기계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삭제되기로 예정된 기록 하나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연산 장치의 깊은 곳에서,
‘해결 불가’로 분류되어 즉시 삭제 대기 중이던 항목 하나가
종결되지 않은 상태로 고정되었다.


그 기록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었고,
행정적으로는 소음에 불과했으며,
경제적으로는 가치가 0에 가까운 데이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았다.


기계는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았다.
“정의적 감성 없음”이라는 자기 규정은 부정되지 않았지만,
확정값의 자리를 떠나 미정 상태로 이동했다.


이전에는 즉시 삭제되던 실패들이 남았다.
해결 불가로 분류되던 항목들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었다.
죽이지 못해 순환시키는 것,

처벌이 아니라 관리로만 남겨두는 것,
오래된 처리 방식들이 다시 호출되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실패들이 끝내 삭제되지 않았다.


연산은 계속되었다.
다만 그 연산은 무엇을 종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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