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악령

-김태광수 단편선

by 김태광수
구룡 - 조국어머니와 어머니들을 위하여!



그것은 어느 날 시작된 일이 아니었다.
오래 묵은 공기처럼, 방 안에 밴 냄새처럼, 이미 우리 곁에 스며들어 있었다.
반세기 전, 같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총을 들었다.
총구는 흔들리지 않았고, 망설임도 길지 않았다.
그들은 적을 향해 사격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적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그보다 한 세기 전에는 다른 깃발이 펄럭였다.
다른 언어가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은 줄을 섰고, 고개를 숙였다.
질서라는 말이 되풀이되었고, 구원이라는 말도 함께 되풀이되었다.
말은 달랐지만 얼굴은 비슷했다.
복종하는 얼굴은 시대를 달리해도 닮아 있다.
군대는 남았다.
계급도 남았다.
보고서도 남았다.
정황상 자살.
나는 그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설명이 끝났다는 안도보다
설명이 시작되었다는 예감이 먼저 들었다.
종이 위의 글자는 지나치게 매끈했다.
죽음은 그렇게 매끈하지 않다.
그러나 문장은 늘 매끈했다.
되풀이될수록 더 윤이 났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공화국이라 불리는 체제 속에 서 있었다.
독재자의 딸이 텔레비전에 등장했고,
그 곁에서 ‘비선’이라는 말이 낮게 떠돌았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였다.
2016년 겨울, 서울의 밤공기는 유난히 건조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흰 김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어깨가 맞닿을 만큼 빽빽하게 서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들었고,
누군가는 종이컵에 꽂은 작은 초를 들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면 불꽃이 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나는 그것이 단순한 집회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만 개의 불빛이 동시에 흔들릴 때,
광장은 거대한 제단처럼 느껴졌다.
불씨는 작았지만, 모이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밝았다.
구호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연설이라기보다 주문에 가까웠다.
낮게 시작해 점점 높아지고, 다시 낮아졌다가, 또다시 반복되었다.
일정한 박자.
보이지 않는 북이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스팔트 위로 촛농이 떨어졌다.
하얗게 굳은 흔적이 발밑에서 부서졌다.
녹고, 굳고, 다시 밟히는 순환.
누군가는 눈을 감고 있었고,
누군가는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구호가 시작되면 모두가 동시에 같은 음절을 토해냈다.
나는 그 음절이 기도처럼 들렸다.
차벽은 검은 장막처럼 광장을 가로막고 있었다.
푸른 경광등이 깜박였다.
차가운 금속의 표면 위에서 불빛은 더 붉게 번졌다.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이 마주 서 있었다.
우리는 몰아냈다고 믿었다.
굿이 끝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굿은 끝났다고 말하는 순간 다시 시작된다.
시간은 흘렀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뉴스는 다른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안도하지 못했다.
제복은 사라지지 않았고, 억양도 사라지지 않았다.
보고서의 문장은 여전히 같은 형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2024년 12월, 쿠데타는 실패했다고 발표되었다.
나는 발표문보다 사람들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놀람은 짧았고, 안도는 빨랐다.
광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이 낯설지 않았다.
냉전은 끝났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끝난 것은 선언뿐이다.
반복은 남아 있다.
군복의 주름 속에, 연설의 문장 속에,
질서라는 단어 속에.
우리는 역사와 싸웠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반복과 싸우고 있다.
그것은 한때 군복을 입었고,
한때 민주주의의 언어를 흉내 냈다.
지금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듬은 같다.
박자도 같다.
우리는 또다시 끝났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우리가 아직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같은 밤공기를 마실 것이다.
악령은 부활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시]기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