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의 삶

당신의 평범한 하루는, 인류 대부분이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삶이다.

by 흘려도 괜찮아

상위 1%의 삶.

언제부턴가 이 말은 강남 어딘가의 초호화 펜트하우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삶,

뉴스 기사나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인물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기준을 ‘재산’이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 바꿔 보면 어떨까?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먹고,

병원에 갈 수 있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

손가락 한 번 움직이면, 새벽 공기를 타고 물건이 문 앞에 도착하는 삶.

그 모든 게 지금 우리의 일상이라면

그건 어쩌면, 왕조차도 누리지 못했던 삶이 아닐까.


지금까지 지구상에 태어난 인류는 약 1,100억 명.

그중 대부분은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해 강으로 걸어가야 했고,

질병 앞에 속수무책이었으며,

태어난 계급이나 성별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졌다.


그 현실 안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조건—

난방이 되는 방, 클릭 한 번으로 도착하는 정보,

필요할 때 연결되는 의료 시스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이건 명백히,

인류 역사상 가장 드문 확률 위에 놓인 삶이다.


하루는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잠들던 밤이었다.

불을 끄고도 한참을 말없이 누워 있었고,

그 조용한 어둠 속에서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이 순간이, 내가 가진 전부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부족함이 아니라—

충분함처럼 느껴졌다.


조그마한 손 하나에서 전해지는 체온,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분명한 지금.

그 감각 하나가

내가 가진 삶의 무게를 다시 정리해 주었다.


우리는 자주 불편함을 느낀다.

앱이 몇 초만 느려도 짜증이 나고,

택배가 하루만 늦어도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하지만 그건 삶이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매끄럽고 빠른 흐름에 익숙해진 감각이 만들어낸 피로일 수 있다.


심리학에선 이것을 ‘기준점 착각(anchoring bias)’이라 부른다.

낮아진 감동의 문턱,

높아진 당연함의 기준.


오늘이 평범해 보이는 이유는,

사실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는 평화,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갈 수 있는 의료,

집에 돌아와 불을 켤 수 있는 전기,

배고플 때 먹을 수 있는 음식,

그리고 잠들기 전 나누는 말 한마디.


이 모든 것이,

어느 시절 누구에게는 죽도록 간절했던 조건이라는 걸 기억하면

지금 우리가 어디쯤 서 있는지 다시 알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방 안.

밖은 아직 서늘하지만,

아이들은 따뜻한 이불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고,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아무런 위협 없이 앉아

내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다.


불평보다 감사를 말할 수 있는 자리는, 흔하지 않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우리가,

어쩌면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일지 모른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삶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이 삶,

이미 놀라운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