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높낮이를 최소화하려 애썼지만, 이상하게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슬픔을 넘어선 극심한 후회와 허무함이 밀려온 탓에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중간했던 관계에서 비롯된 일들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애초에 도울 기회도, 내가 짊어질 여유도, 너를 진심으로 돌볼 마음조차 없었기에, 그저 아무 일 아닌 듯 넘겨지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는 남이었기에, 아무 흔적 없이 떠난 너였기에 난 괜찮아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난 널 돕지 못했을 거다.
허공에 떠도는 생각을 잡던중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꽂혔다.
“유화야~ 뭐 하니? 수업 듣고 있지?”
“아. 네네”
“왜 어디 아파? 평소에 안 그러잖아”
“...”
“자자. 얘들아 내일 여름방학 끝난다고 정신 놓았니? 여기 중요하다. 집중하자”
눈을 비비고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찬물이라도 마셔야 하나. 수진이 생각으로 달까 오른 머리는 금세 식지 않았다. 나중에 본 필기노트는 엉망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을 향했다. 오늘따라 생소한 것들이 많이 보였다. 비둘기.. 차바퀴에 밟힌 참새와 쥐.. 고장 났는지 깜박이는 누런 가로등. 눈에 익은 것들인데 어째서 생소할까? 그리고 속에 끼어든 그 애. 언제 잊힐까.
현관문 비번을 눌렀다. 1100921. 하나하나 누를 때마다 가늘하고 높은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다녀왔습니다”
“왔어? 오늘 좀 일찍 왔네. 숙제가 적었니?”
“오늘 컨디션이 별로라.. 숙제는 내일 하려고 가지고 왔어요.”
“아 수진이 때문에? 그러게 어떡하냐. 뉴스에도 떴더라. 수진이 엄마도 참.. 아, 너는 괜찮아?”
“네.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그냥 같은 학원에 같이 다닌 애예요.”
“그래 그냥 잊어. 별 쓸데없는 걸 기억해서 이득 없다. 그냥 방해만 될 거야. 한번 지나간 사람으로.. 아니 그냥 없던 거로 하는 게 편할 거야. 그래야 학원 다닐 때 좀 편하지.”
“그냥 없던 애로..”
“그래 그게 편할 거야. 그냥 없던 일. 없던 애.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거, 그리고 오히려 힘들게 하는 게 있다면 없어지는 게 나아.”
“... 네”
“그래. 얼른 씻고 할거 해”
“네”
답은 입술 밖으로 겨우 기어 나왔다. 어딘가 텅 비어버린 듯한 목소리.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의 시선을 피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섰다. 닫힌 문이 외부의 냉혹한 소리를 차단하는 것 같았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냥 없던 애로... 없던 일로.... 어떻게 그래? 어떻게 없던 일이 돼? 그 애는 존재했잖아. 웃고, 떠들고, 가끔은 혼자 울던 모습까지, 모두 선명한데.'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잊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수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린 정말 남이었을까. 그렇게 말하기엔,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나누지 않았나. 그래, 물론 진심으로 돌볼 마음까지는 없었을지 몰라도.
찬 공기가 스며드는 창밖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고장 난 가로등의 깜빡임이 희미하게 방 안까지 닿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 서랍을 열었다. 맨 아래, 구석에 처박아 둔 작은 상자. 그 안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웃고 있는 두 명의 소녀. 한 명은 자신, 다른 한 명은 그 개었다. '없던 애'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게 거기 있었다. 그날에 말한 말도 한 구석에서 기억이 났다. 엄마는 왜 그리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엄마에게는 정말 없던 애였겠지. 그게 더 슬펐다.
사진 속 그 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봤다. 저 해맑은 웃음 뒤에 어떤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난 알지 못했다. 아니, 사실 알았다. 그녀가 보내던 신호들을, 도움을 청하던 눈빛들을, 모르는 척 외면했다. 내가 짊어질 무게가 버거웠기에. 고작 중학생인 내가 뭘 어쩌겠다고?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그 모든 변명을 허물었다. 나 혼자 괜찮으려던 이기심이, 결국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다는 절망감만 남긴 채.
어둠이 방을 삼키는 듯했다. 스탠드 스위치를 눌렀지만, 낡은 등이 여러 번 깜빡거리다 간신히 희미한 빛을 토해냈다. 그마저도 어두컴컴한 방의 구석구석을 비추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꼭 내 마음 같았다. 아무리 애써도 환해지지 않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핸드폰이 지지직거렸다. 평소엔 절대 보지 않던 커뮤니티 앱 알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망설였다. 그 애 관련 글일까. 또다시 심장이 죄어오는 느낌에 손이 떨렸다. 결국 액정을 켜고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학원 공지였다. [내일 보충수업 안내: 국어, 영어 심화반 하교 후부터 10시까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 애도, 그 애의 부재도, 엄마의 싸늘한 조언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상의 흐름에 맞춰 내일도 똑같이 학원 책상에 앉아 있을 터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꼭 아무 일도 없어야 할까? 잊어지고 사라지는 세상을 나도 뒷따라야할까? 그 애. 아니 수진이는 잊어지고 싶을까?’ 이렇게 생각했지만 될 수 있어야만 했다. 이 성적 집착이 엉망이 된 자신을 붙잡아 줄 유일한 동아줄이었으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