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그때 나는 그렇게도 맑았을까.. 아니, 너무 맑아서 세상의 그림자에 더 쉽게 얼룩이 진 걸까.]
“엄마, 엄마! 나 아까 아빠가 차 타고 마법 동굴 들어가는 거 봤어! 거기서 아빠랑 예쁜 공주님이랑 같이 있었는데, 나도 가보고 싶어!”
한여름, 아이가 엄마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을 쏟아냈다.
“M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진짜 반짝반짝 멋졌거든!”
자줏빛 보라 커튼은 아이 눈엔 반짝이는 마법 동굴처럼 보였고, 아빠와 공주님은 그저 동화 속 주인공처럼 멋지고 아름다웠다.
흥분하며 우수수 말을 이어가던 아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항상 웃음을 머금던 엄마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망인지, 슬픔인지, 차마 말로 담을 수 없는 감정들이 그녀의 눈에 담겨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왜 그래?”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으며, 마치 무언갈 숨기듯 조용히 말했다.
“유세은. 오늘 있었던 일은, 엄마랑만 아는 비밀이야.
이걸 누구한테 말하면... 마법이 사라질지도 모르거든. 알겠지?”
엄마는 힘겹게 숨을 이어가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응! 엄마. 당연하지”
마법 동굴 이야기를 꺼낸 그날 이후, 집안의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있어 ‘함께 아빠를 기다리던 엄마’는 점점 사라졌고, 이제는 늘 침대에 누워 있는, 때로는 숨 쉬는 것도 잊은 듯한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누워 있는 시체 같았다. 아빠는 아침에만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고, 언제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가끔 밤중에 큰 소리에 깨어난 적도 있었지만, 아이는 그저 이불속으로 숨어 다시 잠드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났다. 아이의 아빠는 더 이상 아이의 부모로 지내지 않기로 했다. 집에서 짐을 쌓고 나가는 아빠를 아이는 졸래졸래 따라갔다.
“아빠, 어디가? 나도 같이 가!”
아빠는 아이를 한참 바라보더니 찡그리며 웃었다. 그리곤 원망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 좋았지 않았을까.”
“어....?”
그 순간 아이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빠는 그렇게 아이를 남기고 떠나갔다.
아이는 아빠가 없어진 것에 큰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아님, 그런 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수밖에 없었다. 10살인 아이는 세상이 멈춘 듯 가만히 엄마를 위해 집안일을 해야만 했고 자신마저 무너지면 안 된단 생각에 계속 움직였다. 아빠가 떠나고 3일쯤 지나 아이의 친할머니가 와서 병든 집안을 도왔지만 잠깐이었다. 모두가 아이를 버린 것이다.
그렇게 겨울이 되고 흰 눈이 쌓일 때쯤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압박하며 격노했다.
“너만 없었으면, 그 입이 없었으면 모든 게 다 좋았을 텐데!”
갈라지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며 아이를 마구잡이로 폭행했다. 그녀는 다 사라지라는 듯 소리만 질러댔고 아이는 그런 상황에 자신의 입을 만지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얼마뒤 아이의 엄마는 화장실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엄마가 죽은 후 아이의 아빠를 찾아보았지만 아이의 아빠는 비극적 이게도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소식이 전해왔다.
그렇게 말 많고 밝았던 아이는 모든 말을 멈추었고 반짝이는 세상은 점차 아이를 조여 오는 감옥이 되었다.
“나만 없으면 해결되는데, 왜 나만 남았어..”
아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아이는 말하는 것을 까먹기로 했다.
-
바람 같은
[그런 네가 대단하다 느껴졌어.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네가 부러웠고.]
-
3월 4일
새어 나온 찬 바람에 뒤척이던 몸을 일으켰다. 허공을 보며 확인한 시계는 6시 40분과 45분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간의 스트레칭하며 눈을 감았다. 밖에서 들리는 작은 새의 지저귐과 차디찬 바람의 소리, 이웃집에서 들리는 샤워기 소리. 평소에는 무뎌진 소리가 크게도 들렸다. 참 다행인 점은 아직 삼촌과 이모가 잠에 들어있다는 점이었다. 등교 첫날부터 짜증과 집안일은 사양이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조용히 새 교복을 입고 낡은 가방에 필기도구를 수셔 넣었다. 동시에 책상 위 화분에서 밤새 떨어진 꽃 잎들을 정리했다. 조금씩 죽어가는 꽃을 보니 오는 길에 새 꽃을 사야 할 것 같았다.
내 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런 후 살금살금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평소라면 5분밖에 안 걸리는 일을 조용히 하느라 10분이나 걸렸다.
스치듯 거울을 보니 약간 부은 얼굴에 쌍꺼풀이 진 검고도 깊은 눈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금세 축축해진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 있는 동시에 안방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모와 삼촌이 일어난 것이다. 그 즉시 닦고 있던 수건을 다시 걸어두고 현관문을 향해 뛰쳐나갔다.
바람이 찼다. 동복이라 해도 무릎과 얼굴은 시렸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벽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긴 곳은 개미와 풀도 온기도 없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그러더니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이제는 집을 나올 수 있는 게 기뻤다.
예상보다 일찍 나온 탓에 벌써 학교에 도착했다. 교문은 닫쳐있었고 조금 걸어가 확인해 본 후문도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앞으로 메고 후문 옆 벤치에 앉았다. 7시 15분.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공허함, 어쩌면 쫓기지 않는 여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도중 건너편에서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훈훈한 얼굴에 키도 컸다. 누구에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걸까. 당사자가 참 부러웠다. 그런데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고 그 남자애가 나에게 점점 걸어왔다. 그 짧은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이건 좋아서가 아니다, 무서워서 혹은 긴장해서였다.
그는 어김없이 내 앞에 섰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가 입을 열었다.
“왜 인사 안 받아 줬어? 아까 건너편에서 인사했는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에게 하는 줄 몰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음.. 하하. 미안 너무 성급했지?”
그렇게 말하곤 내가 앉아있던 벤치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를 피해 조금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는 그걸 보곤 무언가 반응을 하려 했지만 금방 그만두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생각보다 잘생긴 강아지상 얼굴에, 가늘어 아이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만 무언가.. 만화에서 나온 것만 같았다.
내가 그를 분석하는 사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는 그런 침묵을 멈추고 싶은 듯 다시 말을 걸었다.
“내 이름은 ‘서라온’이야. 이번에 18살이 됐고.. 2-5반. MBTI는 ENFP에서 ENTP 와다갔다. 너는?”
라온이.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기다리라는 포즈를 취했다. 라온은 끄덕였고 나는 가방에서 연필과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는 나의 행동을 보고 갸우뚱거리더니 금세 의미를 알았다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노트를 펼치고 무슨 말을 쓸까 고민을 하다 적었다.
‘안녕. 나는 유세은이야. 18살이고 2-5반. MBTI는 INTP야.’
무릎에 대고 쓰느라 삐뚤삐뚤 한 글씨였지만 나름 예쁘게 쓸려 노력했다. 나에게는 이 문장이 첫 만남이니까.
“세은. 이름 예쁘다. 음 초면에 실례일 수 있지만... 혹시 청각장애인이야?”
라온은 괜히 입모양을 또박또박거렸다. 익숙한 일이지만 훈훈한 얼굴 덕분일까, 조금 웃겼다. 나는 다시 연필을 쥐었다.
‘청각장애인 아니야. 잘 들려. 더군다나 음악도 좋아하고. 음.. 말을 못 한다고 생각하면 편해. 아, 친구들한테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거니까, 들리는 건 비밀이야. 귀찮아지거든.’
나는 함묵증을 가지고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중학교 1학년때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함묵증은 자신의 선택으로 말을 하지 않는 병이라 말씀하셨는데, 솔직히 말하면 선택할 수 없는 것 같다. 수도 없이 말하기 연습을 해봤지만 구역질만 나왔고 때때론 호흡곤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가족에게는 말을 할 수 있다곤 하지만 나는 딱히 가족이라 할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병은 더 악화됐고 지금은 일상이 되어 주변인들도 날 청각장애인으로 알고 있다. 귀가 들리지만 말 거는 것, 즉 소통을 무서워했어서 어렸을 적부터 청각장애인이라고 물어보면 끄덕였다. 그런데 라온에게는 뭔가 문이 열렸다. 노트에 적으면서도 ‘나중에 곤란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몇십 번 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라온이랑 친해져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트에 적힌 글을 보고 라온은 어딘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