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낯선 땅에 딥다이브, 나만의 궤적을 그리다
한국에서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일종의 거대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정갈하게 치워진 거실, 완벽하게 차려진 상차림, 그리고 집주인의 사생활을 기꺼이 노출하겠다는 용기까지. 현대 한국인들의 만남은 집이라는 내밀한 공간 대신, 세련된 인테리어와 보장된 맛이 있는 카페나 음식점이라는 '중립 지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이었다. 나 역시 그 익숙한 도시의 문법 속에서 30년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타지키스탄 두샨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이 견고한 문법이 이곳에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밖에서 누군가를 만날 ‘중립 지대’ 자체가 태부족했다. 당시 두샨베의 식당들은 한국인의 까다로운 위생 기준이나 인테리어 취향을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두컴컴한 조명, 삐걱거리는 의자, 그리고
묘하게 미끄러운 식탁보까지. 밖에서의 만남은 낭만보다는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지에 거주하는 교민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홈 파티'가 일상이 되었다. "밖에서 볼까요?"라는
말 대신 "우리 집으로 오세요"라는 말이 인사처럼 오갔다. 처음에는 타인의 사적인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이 못내 쑥스럽고 송구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부엌에서 나는 된장찌개 냄새와 낡은 소파 위에서 나누는 두서없는 대화들은, 낯선 타국 생활로 텅 비어버린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세련된 에스프레소 머신은 없어도, 가스레인지 위에서 덜덜거리며 끓는 주전자 소리가 그 어떤 카페의 배경음악보다 감미로웠다.
진짜 놀라운 경험은 현지인들의 초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업무차 지방 출장을 갈 때면, 현지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당겼다. 타지키스탄뿐만 아니라 이후 거쳐 간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손님은 ‘신의 선물’이었고, 그 선물을 대접하는 것은 의무를 넘어선 순수한 환희처럼 보였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도로의 포장 상태가 험악해질수록 그들의 환대는 반비례하여 뜨거워졌다. 어느 산골 마을에서 마주한 식탁은 충격적일 정도로 풍성했다.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고기를 잡고, 아침부터 정성껏 구워낸 '논(Nan)'과 제철
과일들이 끝도 없이 상 위로 올라왔다. 그들의 경제적 형편을 짐작할 때, 이 상차림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희생인지 알기에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고기 한 점이 때론 묵직한 돌덩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주인장은 연신 내 접시에 음식을 얹어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앞에는 언어의 장벽도, 문화의 생소함도 무색해졌다. 화려한 인테리어가 주는 가벼운 기쁨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향한 존중과 감사를 담아 내놓는 밥상 한 그릇의 무게가 훨씬 컸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남의 집밥을 먹어본 적이 있었을까. 두샨베의 낡은 아파트부터 파미르 자락의 흙집까지, 나는 그 수많은 식탁을 거치며 이방인에서 점차 이 땅의 이웃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한국의 카페 창가에 앉아 세련된 브런치를 즐기던 청년은 이제 낡은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손으로 뜯은 빵을 현지인들과 나누며 진정한 ‘식구(食口)’의 의미를 배우게 된 것이다.
집이라는 문턱을 낮추자,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도 함께 열렸다. 척박한 인프라와 결핍된 환경 속에서도 내 1년의 시간이 시종일관 따뜻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처에 널린 '세상에서 가장 넓은 식탁'들이 나를 기다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본이 만들어낸 서비스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지고지순한 품격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아파트 내 이웃들의 동네 식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