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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서점에서

중국 당나라 문인 두보의 시에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글이 있다. 장자(莊子)가 친구 혜시(惠施)의 장서를 지칭한 말이다. 그 시대의 글이 죽간에 쓰였으니 다섯 수레에 책을 가득 실으면 요즈음 서적으로 치면 천권 정도를 이른 말일 것이다. 평생 천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독서의 가성비는 그야말로 으뜸이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은 대개 독서에서 나온다. 부지불식간에 책 속의 구절  하나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삶 속에 체화되어 생각과 언어로 구현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언제부터인가 밥 먹듯, 놀듯이 책을 들춰보고, 즐기면서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세상 모든 정보는 지천에 쉬이도 널려있으며 굳이 책을 찾지 않아도 손안의 이동전화에서 해답을 찾는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독서를 원하면서도 독서하지 않는 국민이 다수가 되어 간다. 



서점이 사라지는 환경 탓도 크다. 동네 서점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종이 활자의 부피는 인터넷의 가벼움에 비해 무겁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청년들의 약속은 서점에서 이뤄졌으며 동네 어귀에 어김없이 자리한 서점에서의 소소한 일상은 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서점은 사양사업이 되었으며 만 하루면 쾌속으로 배달되는 인터넷 서점의 편리성은 그 사멸을 더더욱 앞당겼다.   



어찌 세상의 모든 글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는가. 손바닥 크기의 액정화면을 넘기는 수월함보다 책장을 넘기는 불편함이 수반되더라도 독서는 조금 더 사유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이의 내면에 함께 다가가는 도구이다. 난해하고 부담스러운 내용일지라도 결국 좋은 글은 성찰의 힘이 전제되어야 한다. 뇌리에도 오래 남는다.



만물의 아름다움이 그러하듯 문장은 군더더기가 적을수록 아름답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난잡하기까지 한 정치나 혼탁한 사회 문제를 벗어나 저마다의 쓸모없는 짓들에 골몰하는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소망한다. 그 자아의 세계는 절제와 문장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거친, 일상에서 비롯된 소재와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 현실을 깊이 응시하는 직관력, 직접적이면서도 명료한 어법이 돋보이는 글들이 채워준다 그러한 책들은 차고 넘친다. 우리가 분주함을 핑계로 서점에 머무르지 않아 발견되지 않을 뿐이다.



눈에 띄게 함축미가 돋보이는 아포리즘으로 분류할 수 있는 문장들로 구성된 책들이 서점의 진열대에서 호기심 어린 독자들을 기다린다. 어느 하루 들른 서점에서  그랬다. 이럴 땐‘유레카’이다. 이러한 글들은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존재감이 상당하다. 일상에서 비롯된 소재와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 현실을 깊이 응시하는 직관력, 그리고 직접적이면서도 명료한 어법이 돋보이는 글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공감은 저절로 따라오며 경직된 정신을 시나브로 풀어 헤친다. 



시대를 넘어선 시공간의 속살에는 누군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작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내가 걸어온 길이 외롭지 않다. 동반자를 만난 듯 의지가 되기도 한다. 너덜 해진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독여진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책을 뒤적이다 보면 이렇듯 삶의 동지를 만나는 것이다. 



요즈음 입시를 앞둔 수험생 마냥 책에 밑줄을 그으며 읽는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저장하기 위한 행위는 아니다. 글 속 등장하는 사람들의 기발하고 때로는 너저분한 이야기에 밑줄을 긋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그들의 이야기를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된다. 논문에 각주를 달 듯 밑줄의 흔적을 남기고 나의 언어로 첨삭을 하기도 한다. 이윽고 그들의 열정과 처연한 삶은 내게로 스며든다. 스스로 책장을 넘기는 수고로움에 대한 마땅한 보답이다. 아, 물론 구입하지도 않은 책에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서점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하루 들른 서점에서 사든, 몇 권의 책. 이번엔 누구를 만날지 그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설레는 마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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