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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우영우

근간에 드라마 홀릭이 되었다. 자폐를 가진 천재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대한 팬심이 그렇다. 드라마 속 영우는 대중의 기호에도 부응 중이다. 시청률은 고공행진 중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영우는 몸을 조화롭게 다루지 못해 일상은 늘 불편하다. 그러나 영우는 범접하기 힘든 높은 기억력과 낮은 사회성이 신비롭게 결합된 존재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듯이 영우의 창의적 발견에는 어김없이 고래가 출몰한다. 그 고래는 찬사를 받는다.


영우에 몰입 중,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증인’의 지우가 자연스레 소환되었다. 영우와 같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고등학생 지우가 살인사건의 증인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다. 지우는 변호사를 꿈꾼다. 영우가 그랬듯 지우도 장애가 있지만 천재성을 발휘한다. 영우가 변호사를 꿈꾸던 지우의 성인 버전이란 생각은 괜한 억측은 아니다. 같은 작가이기 때문이다.           

 

우영우 신드롬의 명과 암 봐야
불합리한 현실 외면돼선 안 돼
‘다름’ 받아들이는 계기 삼아야
‘상식적 나라의 우영우’ 되기를


놀라운 능력의 바탕에는 자폐인 가운데 희소하게 나타나는 서번트 증후군이다. 영화 ‘레인맨’의 실재 인물인 킴 픽도 자폐인이지만 책 9000권을 통째로 외우던 능력자였다. 영우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세계적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도 그랬다. 대학교수인 그랜딘은 자폐 스펙트럼을 딛고 일어서 세계적 학자가 된 현실 세계의 우영우이다. 영우가 헌법 책을 통째로 외운다는 설정은 그래서 과장이 아니다. 미디어도 자폐인을 재현하는 방식은 ‘극복 서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장애를 딛고 일어서기는 여전히 버겁다.


뚜렷한 치료약도 없고 사회적 논의도 부박한 자폐증은 오롯이 부모와 가족들의 고통으로 감내된다. 가까운 지인의 자폐인 자녀는 편견과 차별 속에서 힘겹게 성장하고 있다. 영우와 참 많이 다르다. 현실 속 그 가족의 일상은 비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하다. 영우와 같은 극소수 서번트증후군은 장애를 타자화했을 뿐이라는 비판은 이유 있다.


엘리자베스 문의 저명한 소설 『어둠의 속도』는 임신 중 진단한 자폐를 모두 치료할 수 있게 된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루 애런데일은 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태어난 마지막 남은 자폐인 세대다. 소설 속 의사들은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자폐를 고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강권한다. 하지만 루는 장애가 자신의 전부가 아닌 일부분일 뿐이라며 강변한다. 루는 ‘어둠의 속도’ 속 또 다른 우영우이다. 그러나 비장애인의 굴절된 시선과의 지난한 혈투는 영우처럼 특출난 재능이 아니고서는 넘어서기 힘들다.


최애 배우가 된 박은빈이 말더듬, 발작, 반향어 등을 리얼하게 연기할수록 혼신의 연기라는 찬사가 붙는 현실은 불편하다. 연기가 어색했다면 자칫 자폐인을 희화화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상찬해도 부족할 드라마에 딴지는 아니다. 다만 드라마 속에서 능력 있고 재기발랄한 영우를 일반화해 실제 장애인이 처한 불합리한 현실이 외면받는 우를 범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야만적 프로파간다처럼 ‘분열은 이익이 된다’는 명제에 인류 역사는 흔들려왔다. 집단 결속의 주요한 테제에는 어김없이 다양성 배제가 작동됐고 ‘다름’은 존중받지 못했다. 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이율배반적이며 이기적이었다. 장애인 차별을 의미하는 ‘에이블리즘(Ableism)’이 그렇다. 정상적인 존재들이 장애를 가진 이들을 매번 배려해야 하는 입장이 불편한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우리는 여전히 장애인에게 열악한 임금이 당연시되고 이동권이 제약된 이상한 나라에 산다. 이런 굴절된 현실을 타개하지 않는다면 우영우에 대한 대중의 호감은 ‘이상한 나라의 우영우’로 머물고 말 것이다. 영우처럼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장애를 가진 이들은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


장애인을 둘러싼 사회적 현실은 변함없다. 우리에겐 더 많은 우영우가 필요하다. 불과 얼마 전 발달·중증장애인과 그 가족이 비극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참담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드라마 속 영우에 열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영우 같지는 않은 절대 다수의 장애인 당사자의 사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랑스러운 우영우와 모진 욕을 먹던 장애인들의 지하철 출퇴근 시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서는 안 된다. ‘이상한 나라의 우영우’로 드라마의 여운을 남기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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