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의 쿠키리포트]
“음수사원” 중국 남북조시대 유신의 문집인 유자산집 징주곡에서 유래된 말이다. 물을 마실 때 근원을 잊지 말라는 의미다. 가장 큰 사랑으로 존재하지만 항상 당연시되었던 존재, 밥처럼 공기처럼 자리하며 자식을 기르고 세운 후 사그라들지만 그 가치를 종종 잊곤 하는 존재인 어머니를 되새겨야 할 격언이다. 속절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시간이 그렇다. 애써 부여잡으려 해도 그러질 못하니 도리 없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다.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늙고 아들도 나이가 차오른다.
반듯했고 단아했던 당신의 일상이 주체적이지 못하니 낙담의 시간은 길어져 간다. 성한 곳보다 아픈 곳이 많아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병원을 다니면서, 이것이 모자간의 보편적 시간이 되리란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다. 아니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는데 맞겠다. 몇 해 전 병환으로 아버지를 황망히 떠나보내고 남겨진 슬픔이 차오르기에 당신의 쇠잔함은 그래서 더 애절하다.
아버지와의 이별 후 일정하진 않아도 책무가 되어 버린 어머니와 주말에 밥을 먹는다. 살갑지 못한 아들의 무덤덤한 근황만으로는 당신을 위로하지 못하니 돌아오는 길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산적한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애절하게 가족들 곁을 떠나신 아버지의 유실된 시간만큼 어머니가 그 시간을 함께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날이 갈수록 확신이 서질 않는다. 가족의 죽음을 통해 이별과 상실을 배운다는 건 고통스럽고 처연한 일이다.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일이지만 가능한 한 늦게 천천히 겪을 수만 있길 소망할 뿐이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이기에 부모와의 작별은 형언하기 힘든 고통이다. 받아 들여야 되는 의학적 이성보다 무기력한 자식으로서의 책망만이 클 뿐이다.
돌아보면 총기 가득한 어머니의 지혜로 아들은 성장했다. 어머니의 고난은 아들의 밥벌이에 거름이 되었고 근면함의 원천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아들을 직시하고 관찰하는 당신의 이야기에 나태해진 정신은 늘 고양되었고, 치기 어린 태도엔 농익은 사랑으로 절제의 미학을 익혀갔다. 아, 그러나 우리 시대 중년들이 그러하듯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자식들 시름에 힘겨워하는 어머니의 삶을 관조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오랜 병간호에 지치신 당신의 고됨과 불안을 온전하게 공감하지 못했다. 그을린 옹이처럼 남겨질 불효이다. 막연하게 언제나 내 시선이 머무는 곳, 그 자리에서 당신의 삶을 지탱해 주실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 불안정한 기대 속 평화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시간은 유한하다. 누구도 예외 없다.
어머니의 나이를 먹고 자란 아들은 인생의 위기에서야 비로소 존재를 깨닫는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성실성으로 아들의 삶을 오롯하게 지켜냈음을 알아챈다. 돌아보면 의사로서의 삶을 지탱하는 지혜는 어머니의 삶에서 기인했다. 어머니는 존재만으로도 위로였다. 누구나가 부모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다. 내 자식이 커갈수록 부모와의 이별은 가까워지며 그 채무는 상환이 난망해진다. 빚을 갚으라 채근조차 하지 않으시니 변제할 마음도 옹색하다.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누구나가 가족에 대한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 태도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 어머니의 삶 속에서 함께한 기억의 용량은 임계점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날로 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 속에 세상에서 가장 아픈 참회인 잘한 일보다 못한 일만 기억하는 아들의 눈물은 부질없다.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섭리에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노릇은 헛되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눈앞의 시간에 천착한다는 것, 그래서 사람은 후회를 반복한다는 태생적 순리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성찰뿐임에도 세상의 아들과 딸들은 우매하다. 아니 게으르다. 내가 그렇다.
고백하건대 아직 삶을 직시할 지혜도,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주체성도, 진실을 말할 담대함도 허약하다. 그래서 같은 실수는 버겁고 절망스럽다.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나고 나서야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 처지일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끼리 이해하고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그 얼마나 행복한가. 영욕의 세월을 함께 살아 낸 존재가 가족이며 그 어떤 환란에도 자식들의 삶과 가치관을 존중하며 거드는 일이 부모에겐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은 위대하다.
자식들을 거두며 신산한 오랜 시간을 살아낸 어머니의 얼굴은 아들의 자화상이다. 아들을 위해 인생을 바친 어머니 마음을 깨닫는 일이 늦춰 져서는 안 된다. 100세 철학자로 불리는 김형석 교수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성인의 그 무엇을 발견한다’ 했다. 깊은 지혜에 고개가 숙여진다. 홀로 남은 어머니의 고독을 관통한 신음을 온전하게 듣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어머니의 남겨진 시간을 성찰의 순간들로 함께 할 것이다. 어머니의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