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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돌보시라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몇 해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대한제국 시대 배경의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유진 초이의 대사, “누구나 제 손톱 밑에 가시가 제일 아플 수 있어. 근데 심장이 뜯겨나가 본 사람 앞에서 아프다 소리는 말아야지. 그건 부끄러움의 문제거든”. 타인의 통증을 대하는 태도를 일깨워준 장면이다.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된 이라하 작가의 웹툰, ‘정신 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속 한 컷의 대사, ‘아프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고 당신도 예외는 아님을 절절한 공감으로 안겨준다.


인간 노화와 질환은 숙명 같은 것

병마는 평온했던 일상 멈추게 해

아픈 후에 건강의 소중함 깨달아

평소 건강관리 인생의 절대가치


그럴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온전하게 공감하는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원해서 아픈 이들은 또한 어디 있겠는가. 가까운 이들이 나의 통증을 알아주지 않아 외롭고 서운해도 누구나가 내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픈 것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본능을 탓해본들 또 어쩌겠는가.


급작스럽게 찾아온 병은 그렇게 평온하던 일상을 어둑하게 침전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슬픔을 전파하는 삶의 불청객이다. 아프면 제 한 몸 지탱하는 것조차 고된 문제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 누구도 큰 병마와 의연하게 대비한 채 맞서는 일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주변을 둘러보면 아픈 이 하나 없는 무탈한 가족은 드물다. 피해 갈 수 없는 노화와 변화무쌍한 바이러스 그리고 날로 열악해지는 생활환경에 극도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영장류의 숙명이다.


오랜 시간 방송에서 건강 프로그램의 패널로 출현하며 만나는 환자들은 저마다의 아픔과 애환을 호소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통증이 찾아온 이후에야 그간 건강수칙을 지켜내지 못하고 살아온 삶을 후회한다는 것이다. 금연과 금주 그리고 운동이라는 기본적인 건강수칙을 지켜내는 일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주변의 조언들도 평소에는 허투루 듣다가 병이 찾아오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하는 점도 같다. 아프다는 것은 일상의 자유를 구속하는 우환이다. 기계적 삶의 시간도 균형을 잃은 채 덜컹거리며 멈춰선다. 그제야 건강의 오롯한 가치를 온전하게 받아들인다.


의학적으로 아픔을 의미하는 통증은 신체 손상과 관련된, 불쾌한 감각이나 감정적 경험을 의미한다. 통증이 있는 환자는 습관처럼 아픈 부위를 만지게 되고 신체 활동은 자연스레 줄어들며, 통증이 유발되지 않도록 늘 자세를 엉거주춤 취하게 되니 으레 당연시해왔던 신체 활동은 위축된다. 제 손으로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쉽지 않기에 삶의 만족도는 추락한다.


오랜 세월 진료실에서 체득한 바로는 환자의 통증은 여간해서 정도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임상 경험으로 병에 따른 통증의 강도만 짐작할 뿐이다. 환자가 자신의 아픈 정도를 의사에게 세세히 이야기 해주지 않으면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와 친밀도가 중요한 이유이다. 환자의 상황에 따라서 통증을 가늠하는 평가는 언제나 주관적일 수 있다. 그래서 통증 평가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통증의 불편 정도를 평가하는 다양한 설문지들이 개발되어 임상과 연구에 활용되지만, 환자의 아픔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의학적으로 한계가 있다. 환자 개개인의 기질과 성향이 각각 다르기도 하지만 인간의 아픔을 수치화, 객관화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정도가 약하든 심하든, 모든 환자의 통증에 천편일률적인 처방 관행이 개선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9988’을 원하고, ‘백세시대’를 당연시하지만 건강이 받쳐주지 않는 수명 연장은 가혹하다. 아이는 줄고 노인은 늘어나는 저출생 고령화 한국 사회에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은 삶이 더 중요하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 모델로 우리는 줄달음쳐 왔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은 요양병원에서 외롭게 세상과 작별하고 있다. 아프지 말고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평소의 건강관리는 절대가치가 되어야 한다.


몸이 아프면 자존감도 낮아지기 마련이다. 부자연스러운 신체 탓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이로 인해 운신에 제약까지 느끼면, 아픈 이의 존재는 더욱 작아진다. 경험이 그랬다. 몇 해 전 갑자기 턱을 크게 다치는 일이 생긴 후 아프기 전과 후의 일상은 마치 긴 터널 안과 밖의 명암 차이 같았다. 양치질도 세수도 왜 그토록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 아픈 이들은 왜 그토록 평소 어둡고 무표정했었는지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당연시되던 신체의 움직임이 제약을 받고 옷을 입기 위해 몸을 가누는 것조차 온전치 않았다. 가족의 염려도 어느 때보다 소중하고 민감했다. 수고스러운 고생을 수개월을 하고 나니 환자의 통증을 대하는 의사로서의 태도도 공감이 깊어졌다.


초여름, 지천 구석구석에 어김없이 피어난 들장미의 강건함으로 생을 살려거든, 부디 아프지 마시라. 무례하고 서늘한 협박으로 들릴지언정 ‘제발 건강을 돌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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