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l 2024.10.25
매년 10월이면 세계인의 이목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집중된다. 수상하는 개인의 영예를 넘어 국격 상승을 가져오는 절대적 권위의 노벨상 수상자 명단이 공개되기 때문이다. 늘 부러웠지만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되었던 노벨상이 명실공히 우리의 것이 되었다.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로 인해 최고 문화국 반열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침체되었던 출판시장에는 훈풍이 불고 독서는 다시 시민들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 노벨상이 주는 문화적 선물이다.
생리의학상 수상자 절반이 의사
일본 의과학자 16명 노벨상 받아
오랜 기간 연구환경 구축의 결과
의대 정원 확장만으론 불가능
부문마다 최고의 명예와 가치를 인정받지만 ‘인류복지 공헌’이라는 수상자 결정의 취지를 볼 때 상의 백미는 단연 ‘인류 건강’과 직결된 생리의학상이 아닐까 싶다. 올해 수상자로는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교의 빅터 엠브로스 교수와 하버드 대학교의 게리 러브컨 교수가 선정되었다. 이들은 1993년 세포 내에 존재하는 마이크로 RNA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의 연구성과는 인류 건강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노벨 생리의학상은 1901년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123년이 흐르는 동안 22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수상자의 국적을 살펴보면 이중국적을 포함, 미국이 114명으로 독보적 강세를 유지해 왔다. 이어 영국과 독일, 프랑스, 스웨덴이 다수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실제 역대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 중 유럽이 압도적이다. 선진국 평가를 받는 웬만한 유럽 국가들 모두 수상자를 배출했다.
최근 노벨상에서 주목할 부분은 옆 나라 일본의 약진이다. 상을 받은 일본 의과학자는 16명에 달한다. 경이로운 일이다. 일본의 도드라진 약진은 아시아 국가로는 패전 이후 근대화를 시도하며 현대 기초과학의 출발에 동참했고, 과학기술기본법을 제정해 연구환경을 구축한 결과다. 실제 일본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보유한 기초과학 연구소가 즐비하다. 여기에 국가 차원의 지속적 투자와 합리적 인재 육성 정책 등이 연속된 노벨상 수상자 배출이라는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수상자의 면면도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학을 아우르고 있다. 의학적 연구 환경이 그만큼 넓다는 의미일 것이다.
(토마스 펄만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이 지난 7일(현지시각) 스톡홀름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 2024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마이크로RNA의 발견에 기여한 미국의 과학자 빅터 앰브로스와 게리 러브컨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우린 어떤가. 노벨상에 근접했다고 평가받은 연구자 대부분은 여전히 해외 대학 박사 출신이다. 일본과 사뭇 대조적이다. 수도권과 지방 간 연구 환경 차이도 확연히 다르다. 일본과의 경제 규모와 인구 차이를 감안한다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국내총생산 대비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 비중은 세계 상위권이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을 위한 거시적 연구 목표 설정과 연구비의 효율적 배분은 미숙하다. 우리는 너무 수도권 집중적이며 결과에 조급하다. 이런 토양에서는 일본 같은 생리의학상 수상자 배출은 요원하다.
역대 생리의학상 수상자 중 의사가 절반이 넘는다. 의사가 노벨상을 탔다는 것은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역할만이 아닌 ‘연구하는’ 의사 과학자였다는 의미다. 우리 의사들은 의대 재학 시절부터 의사로 활동하기까지 연구를 통해 과학적 발견을 이룰 기회가 거의 없는 교육 환경에 직면해 있다. 현재와 같은 의학 교육과 연구환경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한국에서의 생리의학상 수상자 배출은 불가능하다.
현대 의학은 아직도 여러 분야에서 해결하지 못한 난제들에 직면해 있다. 변이를 거듭하는 코로나, 인플루엔자, 에이즈, 에볼라, 말라리아 등 인류를 위협하는 질병은 여전히 공포스럽다. 완벽에 가까운 예방백신 개발이나 2형 당뇨병, 말기 암의 치료법, 인간의 노화를 되돌리는 역노화 기술 등 인류의 숙원인 미완의 의과학에 우리도 괄목할 성과를 거두려면 대대적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준비되고 있는가.
노벨문학상 열풍을 전하는 언론의 다른 지면에는 2월부터 이어진 의정 갈등 여파로 서울 ‘빅5’ 병원 중 4곳(서울아산·세브란스·서울대·서울성모병원)이 올 상반기에만 총 2135억 원 적자를 보았다는 기사도 실렸다. 전공의 이탈 후 입원·수술이 급격히 준 영향일 것이다. 환자의 불안과 불편이야 말할 나위가 없겠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 사립대 병원, 특히 지방 병원들의 상황은 더 심각할 것이 자명하다.
의대생에게 충분한 연구 과정을 경험하고 동기부여를 하기에는 인적·재정적 자원은 취약하다. 의학연구에 대한 교육도 의대 학부과정에서 등한시되고 있다. 의사가 연구에 집중하거나 연구를 병행할 수 있는 여건도 마땅치 않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의과학 분야로의 진로를 권할 수 있겠는가. 환자 진료보다 의과학 연구를 더 주된 업무로 하는 의사 과학자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여전히 의정 갈등은 진행형이고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노벨문학상에 이어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기다린다면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인지 정부에 묻고 싶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6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