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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환의 건강 프레쉬] 쉼의 미학

지친 삶을 위로해 주는 최애 작가 중 한 명,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위해 집을 떠나 오랫동안 낯선 도시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일을 위해서지만 일을 떠날 수 있는 그의 자유가 사뭇 부럽다. 반면, 의사라는 직업은 구속된 시간 뒤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같다. 조금이라도 이 공간을 벗어나면 입원한 환자는, 수술받은 환자는, 내일 진료를 보러 올 환자는, 온통 환자에 대한 근심은 끼니와 같고 촘촘하게 짜여진 하루의 궤적 안에 포획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움직이는 사물을 보는 동체시력이 발달 되었지만, 색이나 글씨를 구분 못해 세상을 구체적으로 보지는 못하는 고양이의 눈처럼 내 처지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쉼의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동적인 일상은 때로는 자부심과 찬란함을 선사하지만 고양이 눈처럼 소중한 것들을 마냥 지나치고 있진 않는지 때론 긴 한숨이 나온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코로나 시대를 살며 제대로 휴가를 떠날 수도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쉼 상실의 시대이다. 방역수칙을 준수하기에 떠나지 못한다고 애써 위로하지만 자유를 그리는 마음을 위로하기엔 궁색하다. 그러나 사실을 고백하자면 코로나 이전부터 휴가를 자유로이 떠나진 못했다. 환자를 받지 말고 진료를 늦추더라도 가까운 곳이라도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독자 있으시겠다. 그러나 그런 결정을 내리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의사라는 직업은 통상 자신의 스케줄보다 환자의 일상 사이클에 맞추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의사의 숙명이다.


5일 근무제가 정착된 지 20여 년이 가까워 오지만 의사에겐 토요일은 진료가 적은 날 일뿐이다. 그러다 보니 일요일의 휴식은 잠과의 동행 같다. 그러나 육신은 쉬지만 정신은 쉬지 못한다. 삶에는 다양성이 절실하다. 여타의 사람들과 다를 게 없는 반복적 삶을 살다 보면 획일화된 삶의 풍경은 공장에서 토출되어 나오는 빨간 벽돌 같다. 모양은 일정해도 투박하며 간혹 날선 벽돌 끝 모서리에 생채기를 입는다. 모나지 않은 평범함은 바른 처세가 된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줄 선 대오가 아닌 줄달음쳐 앞에 서길 염원한다, 그 남보다는 빠름의 채근은‘쉼’을 게으름으로 오판한다. 느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여전히 인생에서 생경하고 필요하지 않다는 자포자기도 부른다.


유년 시절부터 ‘쉼’은 그렇게 ‘도태’라는 등식으로 성립되고 무한 경쟁의 야만스러운 이데올로기는 한국인의 삶에 짙게 채색된다. 거칠고 처연한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온 우리에게 쉼의 미학은 애당초 호사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사실 잠깐 멈춘다고 우리가 걱정하는 것처럼 삶은 당장 붕괴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조바심이 멈춤을 거부하고 있는데도 움직이라는 마음속 채근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현대인의 집착이 되었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쉼’을 뜻하는‘휴(休)’는 사람인(人)이 나무 목(木)에 기대어 있음을 의미하는 갑골 문자이다. 영어 포레스트(forest)는‘휴식을 위한 것(for rest)’이라는 주장도 있다. ‘쉼’은 추구하던 삶과 목표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도식적인 사회적 잣대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던 삶의 목표가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마중물이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태생적 우매함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기에 딱히 이 방법 말고는 성찰과 영혼을 돌볼 방도가 없다.


일개미 같은 우리는 쉬는 것을 미안해한다. 열심과 성실의 정의가 쉼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쉼’으로 인해 혹시라도 내가 속한 조직 내에서 존재감이 사라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떠날 수 있는 용기 자체는 이미 충분한 존재감이다. ‘쉼’은 삶이 주는 대단한 선물이다. 온전한 하루의 ‘쉼’조차 버겁다면 저녁이 있는 삶이라도 실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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