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에서 존재로
ep-3. 산골생활의 일주일
자녀들은 스쿨버스로 등원을 하고, 집안 청소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글을 쓴다. 10여 일 전에 처음 이곳으로 왔으니 이곳에서도 시간은 참 빠르다. 흐르는 시간 덕에 과반은 적응한 것 같다. 지구를 태울 것 같이 뜨겁던 날씨도 며칠간의 소나기에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자녀들이 산골 생활과 시골 학교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 같아 감사하다. 자녀들이 서울 학교에 있을 때는 몇 반 몇 번 누구였을 것이다. 자녀들이 접하는 최초의 조직 생활이 학교였던 것이다. 다행히 이곳에서는 누구누구야로 불리는 게 더 자연스럽다. 몇 번이라고 할 만큼 한 반에 친구들이 소수이기에 그렇다. 의도치 않게 아무개에서 누구누구로 번호에서 존재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존재들이 하원을 하면 저녁시간부터 취침 시간까지 서로 대화를 하고 웃고 떠들며 소중한 시간을 즐긴다. 자녀들의 눈동자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여유가 좋다.
어린 존재들은 아직 스마트폰이 없다. 다만 의도치 않게 서울 집에서 없었던 TV가 여기는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 토요일 저녁을 제외하곤 그것도 무용지물이다. 미디어와 단절된(단절시킨?) 이곳에서 아빠와 두 자녀가 할 것이라고는 책상 앞에 모여서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것뿐이다. 서울과는 다르게 대화가 겉돌지 않고 깊어지는 느낌이다. 자녀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공부를 하다 아홉 시가 되면 별을 보러 잠깐 나간다. 밖은 칠흑 같이 어둡다. 마당을 산책하고 어둑어둑해진 산을 보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다. 잠깐의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눕는다. 칠흑 같은 어둠은 포근한 이불이 되고, 풀벌레와 귀뚜라미의 합주가 시작된다.
상쾌한 아침. 펜션지기의 배려 덕에 텃밭에서 방울토마토를 필두로 오이와 가지도 맘껏 먹는다. 어제는 가지를 볶아 참기름을 넣고 비빔밥을 해서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 집밥은 건강도 담보하지만 먹고 난 후 기분도 좋다는 장점이 있다. 맑은 공기와 푸르른 나무 그리고 신선한 음식으로 우리는 하루하루 영육이 살찌는 중이다. 감사하다.
행위에서 존재로
회사생활 할 때도 무슨 부서 무슨 직급의 누구의 역할을 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졌었다. 직장생활이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하는 친목 생활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일을 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 시간과 감정을 소비하고 건강을 소비하는 대가를 매월 월급이라는 통장의 숫자와 맞바꾼다.
그렇다. 공적 관계에서 존재는 불필요하다. 다만 이 시간이 젊은 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게 문제이다. 물론 매달 받는 월급은 나와 가족의 생업을 해결해 주기에 직장이 더없이 소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생의 시간을 소비만 해대며 죽음을 향해간다는 것 또한 비극적인 사실임에 틀림없다.
나를 어떻게 행위에서 존재로 전환시킬까? 생업까지 해결하면서 말이다. 결국은 내가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지식이든 상품이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과 타인이 필요를 정합시켜 지속가능하게 서비스를 생산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보람과 존재와 생업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고, 이는 100세 시대라는 요즈음 소명에 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존재의 전환. 그 해법이 남은 생의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특히, 농촌유학이라는 시간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이 고민에 알뜰히 몰입하려 한다. 나를 전환시켜 밥과 존재 그리고 소명까지 해결해 보려 한다.
경험상 주위의 조언은 그다지 영양가가 없었다. 상황이 불가피하건 상황이 되어도 깊은 고민의 과정이 없었건 어차피 본인 수준의 간섭만 하기에 그렇다. 먼저 이 길을 성공시킨 선배들은 차고 넘친다. 그들이 책을 통해 나를 인도한다. 방향은 맞다. 조급하지 않게 차분하고 천천히 다만 꾸준히 전환을 성공시키자.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일상이 너무 바빠져 우선 기도 시간을 세 시간으로 더 늘렸다는 말이 생각난다. 불안한 조급한 마음은 알아차려 내려놓고 다시 명상 호흡으로 일상을 다잡자. 루틴 속에 나를 던지자.
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