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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less May 28. 2024

1장. 나는 중독자 였다

1.1. 중독에 빠진 이유

    

1.1. 중독에 빠진 이유 


나는 중독에 취약했다. 술과 담배에 취약했으며 스마트폰과 같은 미디어와 사람과의 관계에도 취약했다. 취약하다는 말은 쉽게 빠진다는 말이고, 쉽게 빠진다는 말은 헤어나오기 힘든다는 말이다. 탈출구 없이 허우적 대는 동안 시간, 열정 같은 내가 가진 소중한 자원들을 낭비했다. 낭비한 크기 만큼 나의 꿈, 목표 그리고 원하는 삶과 멀어졌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중독에 더 취약했던 이유를 돌이켜 보았다. 어릴적 부모님의 맞벌이로 세 살 무렵부터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삼년 정도 컷다. 시골의 자연은 충만했다. 하늘과 별과 구름과 나무와 새들이 있었고 강아지와 병아리도 있었다. 어른들의 보살핌은 있었겠지만 바쁜 농사일 탓에 혼자 마당에서 놀았던 기억의 파편들이 주로 뇌리를 스친다. 그럼에도 나에게 시골은 아지랑이 피는 따듯한 봄날같은 예쁜 풍경들로 남아있다. 주변 동료나 친구들에 비해 감수성이 조금 더 발달한 듯 한데 이것도 시골 생활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외로움에 엄마를 찾거나, 외로움 자체를 절실히 느꼈던 기억은 사실 잘 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느낀 공허한 감정의 실체 그것이 바로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조부 조모께서 손자를 잘 돌보고 양육해주셨을 터이다. 하지만 부모만이 줄 수 있는 오롯이 충만한 그 감정까지는 채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 내 과거를 탓할 마음은 전혀 없으며 지금도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 조부모님께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다만, 결핍의 원인을 찾고자 과거를 돌이킬 뿐이다. 부모님(특히 어머니)의 부재로 채워지지 못한 그 무렵이 결핍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부모의 사랑이 절대적인 시기에 채우지 못한 사랑의 크기 딱 그 만큼 내 가슴은 휑하니 뚫려버렸다. 결핍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 키만큼 무럭무럭 자라났고, 고독의 공극을 채우기 위해 나를 이곳저곳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학창 시절을 더듬어 보면 그때도 불현듯 찾아오는 외로움이 힘들었던 기억이다. 초등학생 시절에도 그랬고, 중·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시끌벅적 있을땐 시선(주의)이 외부에 한참 빠져있어 잊고 있었지만, 집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나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공허하고 외롭고 불안했었다. 가슴이 뻥 뚫려 버린 빈 곳으로 바람이 휭하고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때면 허겁지겁 전화를 걸어 친구들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잠깐의 통화로 안부를 묻고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공백이 조금 채워지는 듯했다. 곁에 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마음이 편해졌다. 그 불편한 감정을 우선 누그러뜨려야 했다. 당시엔 나만 이런 감정을 절실히 느끼는지 궁금했다. 사실, 그 덕에 친구들은 많았다. 결핍은 충족을 원했기에.     


성인이 되어 군생활을 할 때에는 동료들과 항상 붙어 있었기에 잊고 살았지만 학교를 졸업 하고 서울에 취직 해서 혼자 자취를 할 때 그 감정을 다시 마주했다. 드문드문 올라오는 외로움? 공허함? 같은 그 감정이 불편하고 두려웠다. 때론 회사 생활을 하느라 정신없이 힘든 평일이 공허한 주말보다 나았다. 특히, 명절에 고향을 다녀올 때는 외로움이 극에 달했다. 부모 형제,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와 부산역을 가는 길에서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기차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숨이 턱하니 막혔다. 지금 생각해보니 공황장애 비슷한 느낌이다. 문이 닫히고 기차가 출발하면 실내 공간이 갑갑하게 느껴져 뛰처나가고만 싶었다. 목적지에 도착할때까지 마음을 억누르고 그저 우울하게 창밖만 바라볼 뿐이다. 갑갑한 마음은 서울역에 내려서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고 계속되었고, 자취방에 도착해 짐을 풀어도 나를 옥죄었다. 어서 방을 뛰쳐나와 옥상으로 가야한다. 옥상에서 찬 밤공기를 허겁지겁 들이키고 가족, 친구 여기저기 전화를 한다. 목소리들을 듣는다. 갑갑한건 마찬가지지만 고독감이 조금 가라 않는다. 눈물이 핑돈다.      


성인이 되고 외로움을 피하려 관계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문제는 내면이 충만하지 않고 공허할수록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관계는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직장(동료)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선 기대와 시선, 책임과 의무가 당연한 듯 받아들여졌다. 관계 맺음의 반대 급부였고 무게는 무거웠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관계에 일상이 짓눌렸고 나는 방황했다. 그 무렵부터였다. 결핍의 공극을 중독들로 채우기 시작한 시기가.      


중독의 다른 말은 결핍이다. 중독이 시작되는 이유에는 환경적, 유전적, 개인적 요소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겠지만 그 배경에는 결핍이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결핍은 외로움과 불안함이고 공허함이다. 결핍은 속성상 그 자체로 홀로 고요히 있을 수 없어 어떤식으로든 채워야 한다. 공허한 마음은 만족감, 충만감을 느껴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문제는 결핍을 쉽게 채울수있는 일반적인 도구들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술이나 담배를 하는 동안은 결핍이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허상이다. 그것들을 탐닉하면 할수록 결핍으로 생긴 마음의 공간은 조금씩 더 깍이고 후벼 파인다. 결핍의 공극만 더 커질 뿐이다. 같은 느낌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선 중독 대상에 더 많이 혹은 더 독한 또는 더 자주 빠져들어야 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동안 삶의 귀한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는 당연지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하향하는 삶이 예상될뿐이다.    

  

티비, 스마트폰, 그리고 번잡한 관계는 고요하고 평온해야할 주의를 외부에 빠뜨려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회피하게 만든다. 그들에 심취해있는 동안 만큼은 결핍을 느끼지 못하니 가슴이 충만하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시나브로 나의 ‘주의’가 온전히 넘어간다. ‘주의’는 내 소유가 아니게 되고 나는 껍데기만 남게된다.      


나의 경우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결핍으로 더 쉽게 중독되었고 쉽게 습관이 되었다. 그 속에서 방황하며 다른 사람 보다 헤어나오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술과 담배로 결핍을 채웠고, 관계와 미디어에 주의를 돌려 결핍을 회피했다. 시간은 흐르고 중독은 그 속성대로 깊어져만 갔다.      


중독들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성장을 방해하면서 동시에 자가증식하는 암세포 처럼 점점 더 커져 강력한 괴물이 되고 있었다. 그것들은 나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끌었고, 어느덧 중독에 빠진 나는 본연의 나 스스로를 망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앞 날이 쉽게 예측되는 삶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더 심각한 중독의 늪에 빠져 이번 삶에선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늪은 습이 되고 업이 되어 자식 세대로 이어짐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위기 의식이 들었고 무서웠다.      



그렇게 자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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