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짐과 합리화의 구조에 대하여
도덕(道德)의 침식(侵蝕)~
- 무뎌짐과 합리화의 구조에 대하여 -
도덕은 무너질 때 소리를 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대한 악을 경계하지만, 실제로 도덕의 붕괴는 거대한 악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미세한 균열에서 출발한다. 처음에는 감각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 작은 저항, 어딘가 어긋난 느낌. 양심의 소리다. 그 감각은 아직 기준이 살아 있다는 신호다. 그러나 인간은 불편을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한다. 불편은 해석을 낳고, 해석은 이유를 만들며, 이유는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합리화는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한 번의 타협은 붕괴가 아니다. 그러나 반복된 타협은 기준의 위치를 바꾼다. 선(線)을 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조금씩 물러난다. 이 과정에는 파열음이 없다. 선언도 자각도 거의 없다. 다만 예민함만 줄어들고 변명은 점점 매끄러워질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덕을 절대적 진리라기보다 해석과 힘의 산물로 보았다. 그 통찰은 인간을 해방시키지만 동시에 경고한다. 기준은 언제든지 재해석될 수 있으며 그 재해석은 자기 합리화와 손잡기 쉽다는 것을. 공자는 말한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잘못을 바로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이 말은 도덕의 완전함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힘에 대한 요청이다. 처음에는 ‘예외‘였던 것이 곧 ‘상황‘이 되고 마침내 ‘당연함‘이 된다. 도덕의 침식은 이렇게 완성된다.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무뎌짐과 합리화의 반복이 기준을 서서히 잠식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미 변형된 기준이 새로운 정의처럼 작동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붕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저 시대의 변화라고 말할 뿐이다. 문제는 붕괴 자체보다 그 침식과정이 얼마나 달콤한가에 있다. 합리화는 고통을 줄여준다. 타협은 즉각적인 안정을 준다. 둔감함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침식은 언제나 유혹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대응 역시 거창할 수 없다. 영웅적 선언도, 완벽한 결심도 아니다. 다만 처음의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 스스로를 설득하기 전에 한번 더 멈추는 사유, 자신의 해석을 의심하는 습관. 도덕은 교리가 아니라 긴장이다.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깨어 있으려는 반복적 노력이다. 선이 밀려났다면 다시 옮기면 된다. 무뎌졌다면 다시 감각을 깨우면 된다. 결국 도덕의 최후 방어선은 타인을 향한 엄격함이 아니라 자신의 합리화를 의심하는 힘이다. 붕괴는 조용히 시작된다. 그러나 각성 역시 조용히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도덕을 지킨다는 것은 위대한 선(善)을 실천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 안의 작은 악(惡)이 편안함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넓혀 가지 못하게 하는 일 일지도 모른다. 글 끝에서 칸트의 묘비명이 떠 올랐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
2026 3初月, 春雨가 내리는 날
獨樂齋에서 幽人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