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 불가능성의 징후
마음의 허함에 대하여~
마음의 허함은 흔히 결핍의 문제로 이해된다.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공백, 아직 채워지지 않은 상태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현상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 다. 실제로 많은 경우, 허함은 결핍이 해소된 이후에도 지속되며, 오히려 충족이 반복될수록 더 분명해진다. 이는 허함이 소유의 문제라기보다 ‘삶의 형식에 대한 문제’ 임을 시사한다. 허함의 핵심은 비어있음이 아니라 ‘정착 불가능성’이다. 마음이 머물 수 없는 상태, 어떤 가치나 활동, 관계 속에서도 자신을 완전히 놓을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될 때 허함은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이때 삶은 끊임없는 이동과 시도로 채워지지만, 그 모든 시도는 잠정적 체류에 머문다. 만족은 순간적으로 발생하나, 정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허무는 사람을 외부로 향하게 만든다. 더 많은 성취, 더 강한 자극, 더 극단적인 경험이 그 대안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이 반복은 오히려 허함을 강화시킨다. 허함의 원인이 ’ 부족‘이 아니라 ‘머물 수 없음’이기 때문이다. 머물 수 없는 마음은 무엇을 더해도 안정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은 마음이 충족되었는가가 아니라, 그 삶의 형식이 마음을 허용하는가의 질문으로 관점이 이동할 때 허함은 다른 성격을 띤다. 이 전환을 가능케 하는 영역이 사유다. 사유는 마음을 흥분시키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이 자기 자신으로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설명을 강요하지 않고,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며, 완성을 조건으로 삼지 않는 형식 속에서 마음은 처음으로 유예되지 않는 현재를 획득한다. 삶은 충족되지 않았지만 불안정하지 않고, 비어있으나 흔들리지 않는다. 이는 충만과는 다른 오히려 단단함에 가깝다. 단단함이란 많이 가진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 상태다. 당당함이란 우월함이 아니라, 설명의 불필요성이다. 떳떳함이란 도덕적 과시가 아니라 투명함이다. 충만함이란 채워짐이 아니라,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마음의 허함은 삶의 형식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다. 허함이 사라지는 순간은 마음이 채워질 때가 아니라, 머물 수 있는 형식을 만났을 때다. 그때 삶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으며, 사유는 비어있되 삶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2026 1월 丙午正初 ,
獨楽齋에서 幽人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