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오용한 개념들에 대하여
자기배려•자기성찰•자기검열
- 우리가 오용한 개념들에 대하여 -
요즘 우리는 자주 자신을 돌보고, 성찰하고, 자유롭게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들이 실제 삶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어딘가 어긋나 있다. 개념은 남아 있지만 의미는 비워졌다. 우리는 자기배려를 말하면서 자신을 방치하고, 자기성찰을 말하면서 합리화하고, 자기검열을 말하면서 억압을 떠올린다. 이 글은 이 세 개념을 다시 제자리에 놓기 위한 시도다. 첫째, 자기배려. 자기배려란 자신을 풀어놓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방치하지 않고 어떤 인간이 될것인가를 스스로 형성하는 윤리적 태도다. 미셸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는 기분을 달래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훈육하는 방식이었다. 자유는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다. 그 자유를 감당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배려는 “나부터 챙긴다”라는 말로 축소된다. 책임은 유예되고 규율은 사라진다. 자기방임의 다른 이름이 된다. 자기배려가 필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자기배려 없는 자유는 선택이 아니라 충동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자기성찰. 자기성찰이란 이미 행해진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며 그 동기와 책임을 묻는 사후적(事後的) 내적 심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검토된 삶‘ 은 후회가 아니라 성찰의 삶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성찰은 행위 이후에 축적되는 실천적 지혜였다. 그러나 오늘의 성찰은 대개 이렇다. “나는 나름 생각은 했어”,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성찰은 사라지고 해명만 남는다. 자기성찰은 반성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의 과정이 된다. 성찰 없는 삶은 경험을 남기지 못한다. 자기성찰은 자신을 비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기준을 축적하기 위한 과정이다. 셋째, 자기검열. 자기검열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외부로 내놓기 전에 그 정당성과 책임을 스스로 제한하는 선행적(先行的) 규율이다. 칸트에게 자유란 스스로 세운 법칙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능력이었고, 한나 아렌트가 말한 판단 역시 이 말을 공적 세계에 내놓아도 되는가를 묻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검열은 억압과 침묵으로 오해된다. 자기검열이 없는 사회에서 가장 먼저 검열 당하는 것은 타인의 인내심이다. 자기검열은 자유의 적이 아니라 자유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의지의 문제일까, 능력의 문제일까. 자기배려•자기성찰•자기검열은 즉각적 이익과 쾌락의 반대편에 놓인 기준이다. 불편을 감수해야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흔들어야 하며, 말과 욕망을 줄이는 손해를 감내해야 한다. 이 세 가지의 결핍은 공감의 문제로 이어진다.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읽는 능력 위에서 형성된다. 자신의 감정을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추론할 수 없다. 자기검열 없는 말은 타인을 소진시킨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해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결핍을 대신 감당하게 된다. 거리 두기는 배척이 아니라 자기배려의 마지막 단계이다.
2026 2월初, 다시 추위가 오다
獨樂齋에서 幽人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