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을 바꾸되 나를 버리지 않는 법
철학적 음주(哲學的 飲酒)~
- 의식을 바꾸되 나를 버리지 않는 법 -
술은 인간이 만든 발명품이 아니다. 술은 자연 속에서 인간이 우연히 발견한 가장 오래된 의식 변화(意識變化)의 경험에 가깝다. 익은 과일이 발효되고, 곡물이 시간을 만나, 다른 성질로 변했을 때, 인간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의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술은 처음부터 타락(墜落)의 상징이 아니었다. 술은 의례였고, 공동체였으며, 말과 노래와 제사의 일부였다. 고대의 술은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다르게 느끼기 위한 장치였다. 술의 효능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는 데 있지 않다. 술은 감각(感覺)의 배치(配置)를 바꾼다. 말의 문턱을 낮추고, 감정의 접근성을 높이며, 평소에는 접히던 생각을 잠시 펼쳐 놓는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 술자리는 그저 마시는 자리가 아니었다. 대화가 오가고, 시가 낭송되고, 철학이 태어나는 공간이었다. 플라톤의 ‘향연(饗宴)’이 술자리 대화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술은 전면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술이 아니라, 술 앞에서 무너지는 절제(節制)와 중용(中庸)이었다. 술은 인간을 타락시키기보다 이미 형성(形成)된 인간의 태도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계기였다. 그러나 모든 철학자가 술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칸트와 니체는 술에 냉담했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태도가 단지 도덕적 엄격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칸트는 위장이 약했고, 니체는 만성적인 신경질환과 두통에 시달렸다. 술은 그들에게 쾌락이 아니라 사유를 흐리게 하고, 몸을 무너트리는 자극이었다. 이렇게 보면 철학자들의 술에 대한 태도는 사상의 차이라기보다, 몸과 기질의 차이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술에 대한 폐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술을 둘러싼 맥락(脈絡)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함께 마시던 술은 혼자 삼키는 술이 되었고, 말을 열던 술은 기억을 지우는 술이 되었다. 의식을 전환하던 술은 의식을 마취하는 수단으로 변했다. 술이 도피가 된 것이다. 자신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술은 관계와 감각의 전환이 되지만,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에게는 술은 마취와 삭제가 된다. 그래서 술 앞에서 중요한 것은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이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흔들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무엇만큼은 끝내 놓지 않겠다고 생각하는지이다. 술은 의식을 바꾼다. 그러나 그 변화의 방향까지 대신 선택해 주지는 않는다. 자신을 잃기 위해 마시는 술은 도피(逃避)지만,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마시는 술은 사유(思惟)가 된다. 의식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버리지 않는다. 이 절제된 흔들림, 이것이 내가 말하는 철학적 음주(飲酒)다.
2026 2月初, 막걸리 한잔 후에
獨樂齋에서 幽人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