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H에게 (7)

나는 무지하다 (5)

by 흔들리는별

군대가 거대하고 심술궂은 고목이라면, 대중목욕탕은 유리구두를 내미는 <신데렐라>의 왕자님과 같다. 적절한 신부감을 찾아 예쁜 공예품 한 짝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왕자님. 왕자는, 여인들로 하여금 심판하는 시선 앞에서 맨살을 보일 것을 요구한다. 여인들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발에 걸친 걸 벗고 유리구두에 살을 맞춰본다. 왕자는 모두를 납득시키겠다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다. 왕자의 권력은 공고하니까.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유리구두라는 기준을 받아들인다. 구두를 신을 수만 있다면 누구나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 왕자가 - 모두가 - 꿈꾸는 ‘여자’ 말이다.


왕자를 공주로 성별 반전해도 이야기는 그럴 듯하게 이어진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공주가 마음에 드는 남편감을 찾기 위해 유리로 만든 구두를 전국의 남성들에게 선사한다고 상상해보자. 모든 여자들이 왕자의 권력에 복종했듯이, 모든 남자들도 공주의 권력에 복종할 것이다. 유리 구두에 꼭 맞는 남자 - 신데렐톤(Cinderelton) - 가 되기 위해 남자들은 오히려 유리구두를 피하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다.


대중목욕탕이 이와 같다. 대중목욕탕은 유리구두고, 유리구두를 내미는 왕자/공주는 우리가 속한 문화다. 혹은 사회라고 해도 좋다. 왕자/공주는 유리구두 앞에서 자신의 예비 반려자를 남자 혹은 여자로 나누고, 각자 거기에 맞는 신체적 조건을 갖출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 앞에 줄을 선 모두가 사실 한통속이다.


대중목욕탕에 가면 모두가 알몸인 상태에서 모두가 똑같은 문화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성별만 같다면 알몸을 내보이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문화, 그리고 모두의 몸이 당연히 똑같을 거라고 기대하는 암묵적인 합의가 대중목욕탕 안에 내재되어 있다. 물론 대중목욕탕에 갈 때, 모두의 시선이 항상 감시하듯 내 몸을 향해있다는 건 아니다. 그런 건 지나친 의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대중목욕탕 안에는 분명 ‘너의 몸’이 ‘나의 몸’과 같을 거라는 기본 전제가 깔려있다. 텁텁한 수증기 안에서 그 선명한 전제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너의 몸’과 ‘나의 몸’ 사이에 무언가 두드러진 차이가 존재한다면 - 예를 들어 생식기 모양의 차이라거나, 유독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난 크기라던가, 아니면 없어야 할 게 있는 그런 모습이 눈에 띈다면 - 그러면 ‘너’는 유리구두에 맞지 않는 존재가 된다. 신데렐라도, 신데렐톤도 아닌 게 밝혀진 것이다. 고로, 왕자와 공주는 이 사람들이 마치 없는 것처럼 외면할 수 있다. 아무도 그 외면을 비정하다고 탓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왕자와 공주의 편을 들 것이다.


내 수치심은 어떡할 거냐고, 괜한 기대를 하고 쓸데 없이 두근거렸던 내 마음은 어떡할 거냐고 아무리 따지고 들어도, 이상한 건 오히려 겁도 없이 맨발을 들이민 쪽이 될 것이다. 괜히 왕자와 공주인 게 아니다. 왕자와 공주는 강력하다. 유리구두에 발이 맞지 않는 자들은 대번에 내쳐도 될 만한 권력이 왕자와 공주에게 차고도 넘친다.


그렇다면 외면 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잊으라고, 그리고 앞으로 유리구두의 ‘ㅇ’자만 봐도 멀리 도망치라고 조언할 것이다. 아무리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유리구두가 나타나도 절대로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너를 받아줄 유리구두는 이 세상에 없다고 가르칠 것이다. 하지만 유리구두는 너무나 반짝거리고 아름답기에, 그리고 왕자와 공주는 너무나 멋진 사람들이기에, “혹시….”하는 마음을 품고 도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지나치게 긍정적이다”라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런 건 꿈조차 꾸지 말았어야 한다”고 호통칠 수 있을까?


유리구두를 신어보는 것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다. 내가 봤을 때, 진짜로 죄가 되는 건 유리구두에 맞도록 자기 발을 잘라낸 경우다. <신데렐라>는 원래 구전동화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큰 줄거리는 같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 다양한 변형들이 존재하는데, 그중 한 이야기에는 신데렐라의 새 언니들이 유리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가락과 뒤꿈치를 잘라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유리구두 안에 피가 빨갛게 차서 금방 들키고 말았다고 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깟 유리구두 그게 뭐라고. 왕자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왕자의 눈에 들고 싶었나. 그렇게 해서라도 신데렐라가 되고 싶었나. 공포와 함께 아연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 마음도 비난은 아니다. 그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광기 앞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손을 내젓고 싶은 마음이다. 장담하건대 이런 종류의 사람은, 신데렐라가 되길 탈락한 수많은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잘라내고도 멀쩡한 대접을 받길 바라는 사람은 정상일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동정할지도 모른다. 외모지상주의에 매몰된 나머지 지나친 성형을 거듭한 끝에 기괴한 얼굴형을 가진 사람들을, 어떤 이들이 동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동정도 과연 진정한 동정일지, 나는 의심이 든다.


애초에 왕자와 공주가 권력을 휘두르면서 고작 유리구두 하나 가지고 반려를 정하도록 하는 관행을 비판했어야 했다. “유리구두에 발이 맞아야 다음 대의 왕비가 될 수 있다고요? 그럼 지도력은? 지혜는? 내면의 아름다움은요? 반려자의 자질은 발 크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따져야 하지 않나요?” 불행히도, 왕자와 공주의 권력은 반복해서 말했듯이 너무나 크다. 세습되어 내려온 왕권은 강력해서 민중 하나 둘이 대들고 나선다고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리구두를 내미는 그 손이, 어떤 대단한 가치관이나 윤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내려온 권력에 의탁한 것 뿐이라는 사실도 없어지지 않는다. 유리구두를 내민 손은 강력하다. 맞다. 하지만 옳지 않다. 따라서 유리구두에 발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가 틀렸다는 생각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아, 나는 이 유리구두를 대담하게 깨뜨리기에는 너무 약하구나”라고 한탄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내가 성소수자들에게 묻고 싶었던, “대중목욕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이렇게 치환된다. “왕자의 분노를 사지 않고도 유리구두를 깨뜨릴 방법을 찾아냈습니까?”


만약 아직이라면, 내 입장에서는 최소한 발을 자르는 일만은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다. 하지만 이 또한 그들이 선택할 몫이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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