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H에게 (8)

나는 무지하다 (6)

by 흔들리는별

지금까지 나는 많은 비유와 동화 내용을 빌려와서 동성애, 성소수자, 그리고 그외 내가 모르는 수많은 성들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입장을 표명해왔다. 잘 모르는 영역이기 때문에 최대한 중립적으로 내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추상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공부하는 젠더, 퀴어 이론 관련 책들을 보면, 이 분야는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모호한 방식으로 곱씹으면서 말하는 게 일종의 관례인 것 같다. 뭐 하나 딱 명확하게 특정하는 순간, “그건 아닌데?”라고 반박이 날아오는 게 이쪽 바닥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헤겔, 하이데거, 루소, 로크 같은 철학자들이 비유를 즐겨 쓴 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관념과 가치관과 윤리의 그 불분명한 경계를 조심조심 따라 그리다 보면,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그은 연필 선처럼 흐릿하고 끊일 듯 말 듯한 형태가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느끼기에 성소수자, 젠더, 퀴어 이론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사회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운 느낌이다. 철학자들이 철학 분야에서 그랬듯이 이쪽 전문가들도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그저 연필 선을 긋는 것뿐이고, 그걸 온전히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색을 채울 당사자들의 몫이 아닐까? 철학의 윤곽선을 다양한 후대 사상가들이 살아가면서 각양각색의 색깔들로 채워넣어 오늘날 눈부신 구체를 이뤄냈듯이, 성소수자들의 존재도, 그들의 인권도, 그들의 정체성도 일단 나 같은 몇몇이 모여 윤곽선을 그리는 데 성공하면, 당사자들이 나서서 어떻게든 채워넣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더 밝게. 더 다채롭게. ‘구’라는 고전적이고 재미 없는 형태 말고, 더 특이하고 예측불가능한 모양으로.


나는 이쪽 분야에 무지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 연필 선에 한 획이라고 보태고 싶은 마음에 지금까지 장황설을 늘어놓았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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