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H에게 (9)

나는 궁금하다 (1)

by 흔들리는별

솔직히 나는 나이 서른 쯤 되면, 동성애자를 한 명 쯤 알게 될 줄 알았다. 친구 중 한 명이 커밍아웃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혹은 어른이 되어서 만난 사람들 중 동성애자가 한 두 명 있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지, 하고 생각했다. 누가 “나 사실 동성애자야”라고 말하면 “응, 그렇구나”라고 덤덤하게 말하고 입장을 들어줄 정도의 교양은 갖췄다고 내심 자신했다. 그런데 서른이 넘도록 커밍아웃은커녕, 내 주변에 온통 보수적인 사람들만 더 늘어나는 것 같다. 부모님을 비롯해서 부모님의 지인들, 내 친구들, 대학교에서 만나는 교수님들, 동기들, 그리고 선후배들까지…. 딱히 나에게 동성애자임을 오픈해오거나 혹은 그런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조차 없다. (그런 게 ‘기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좀 우습지만) 하지만 동성애자들이 내가 사는 사회에 존재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나는 동성애자 친구가 없지만, 대학 동기 중에는 자기한테 바이섹슈얼 친구가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으며, 대학에서 여성학 관련 공부를 한 바 있는 한 친구는 레즈비언 작가, 혹은 예술인들을 종종 만나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성 정체성을 털어놓을 만큼 진보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보수적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나도 보수적인 분위기가 익숙해진 나머지, 내가 알아서 그런 분위기가 나는 곳에만 찾아들어가 안주한 탓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굳이 동성애자, 양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를 골라 사귀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친구라는 게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다!”하고 미리 마음 먹고 만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저냥 살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번도 동성애자들의 입장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 입장에 대해 서술하는 에세이를 쓴다는 건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 있다. “네가 차별주의자들과 다를 게 뭐냐?”라고. 그래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건 이미 어느 정도 감안했다. 세상에 누구에게나 둥글둥글한 글이 어딨을까. 가장 다정하고 보드라운 글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 안에 가시가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18세기 제인 웨스트란 작가는 ‘해로울 것 없는 수다스런 동네 아낙’이라는 페르소나를 입고 동시대 여성들에게 지혜를 설파하는 문학을 쓰고 싶어했다. 하지만 웨스트의 글은 오늘날 읽어보면 지독한 여성차별소설이다. 여자는 순종을 미덕으로 삼아야 하고 남편이 폭력을 휘둘러도 조용히 참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나의 글도 내 의도와는 다르게 얼마든지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상처를 주지 않는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대신, “내 생각을 최대한 담아낸 글”을 쓰기로 했다. 마지막 한 점의 후회도 없이, 온전히 내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서 주장도, 반박도, 사유도 다 한 편의 책에 담아내는 게 내 목표다. 이성애자인 나에 대해 쓰면서 동성애자를 주제로 삼겠다고 하는 게 좀 모순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어디선가 듣기로, 우리는 모두 타인의 거울이라고 했다. 내가 나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사실 타인의 모습에 비친 나를 보는 거기 때문에, 나에 대해 탐구하는 건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에 대해 탐구하는 길과 맞닿아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는 건 나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고찰하는 건 곧 나의 것과 완전히 다른 섹슈얼리티를 고찰하는 것과도 연결된다는 소리 아닐까? 그게 동성애건, 양성애건, 트랜스젠더건, 혹은 그 무엇이던 간에 - 사회에서 소위 ‘정상’의 범주에 받아들여지는 나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화내고, 어떤 사람은 기절초풍하는지, 그 생각의 끈을 더듬어가고 싶었다. 그 끝에 뭐가 있을지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는 말하자면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바다에 낚싯줄을 드리운 낚시꾼이다. 뭐가 잡혔으면, 하고 바라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뭐가 잡히길 절박하게 비는 건 아니다. 작은 거라도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낚싯줄에 이끌려 올라온 게 형편 없이 작은 물고기면, 나중에 좀 더 커져서 오라고 다시 놓아주고 안녕! 하고 작별인사를 할 의향도 있다. 내가 즐기는 건 그저 낚시를 하는 기분 - 이 글을 쓰는 기분 - 그 자체일 뿐. 이 글을 쓰면서 실시간으로 뇌를 쓰고 지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이 글의 시작이고 끝이다.


이 글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는 궁금함 - 호기심이다. 나는 나와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시선이 궁금하다. 나한테 세상은 의외로 남한테 관심 없고, 조용하고, 천천히 몸을 뒤척이는 거대한 곰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바로 코앞에서 송곳니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위협이고 괴물이라는 사실이 매번 놀랍다. 내 눈에는 온순한 곰이 다른 이들에겐 흉폭한 야수라는 건 아무리 공부하고 배워도 잘 와닿지 않는 진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게 피부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

세상이 언제까지 나에게 온순하기만 할까? 언젠가 나도 세상에게 위협당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비록 지금 눈 앞의 곰은 내게 발톱을 드러내기는커녕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지만, 내가 조금만 크게 움직이면 바로 돌변하지 않을까? 나는 언젠가 크게 움직이고 싶다. 소리치고, 뛰어오르고, 달리고 싶다. 그런데 그때에도 지금 내 앞에서 조용한 곰이 언제까지나 조용할 거란 생각이 안 드니까, 조바심이 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움직일 곰이라면 빨리 움직이길.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충분히 달릴 준비가 된 다음에 곰이 움직이길 바라는 모순적인 바람도 있다. 그래서 지금 최대한 많이 알아두고 싶은 거다. 저 곰으로부터 한 발 먼저 위협당한 사람들의 입장을. 그들 사이의 길고 긴 추격전을. 그걸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상상하면서 언젠가 나도 달려드는 곰 앞에서 발빠르게 도망칠 준비를 해두고 싶은 거다. 이 감정을 가장 허물 없고 무해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귀찮고 번거로울 순 있지만,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감정은 아니다. ‘참견’과 ‘호기심’은 다르다. 참견은 아예 나를 거부하는 진영 안에 발을 들이미는 거고, 호기심은 경계 언저리에서 기웃기웃거리는 행위에 가깝다. 나를 밀어내는 건 그 진영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누가 내 얼굴을 무례하게 확 밀어제끼기 전까지는 있는 힘껏 기웃거려볼 생각이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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