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H에게 (11)

나는 궁금하다 (3)

by 흔들리는별

내가 퀴어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의 방향은 곧바로 반대편으로 돌릴 수 있다.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고 믿는가?” 사실 내가 성소수자들을 이해할 수 있느냐의 문제보다,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어디까지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지가 더 궁금하다. 성소수자들은, 한국 사회가 LGBT+를 완전히 받아주는 날이 올 거라고 긍정할까? 아니면 평생 이해받을 수 없다고 부정하고 있을까? 사회가 너무 큰 범위라면, 부모는? 친구는? 성소수자들은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체념하고 살고 있을까?


나로 말하자면, 나는 내 정체성이 타인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고 상정하고 산다. 나는 너무 예민하고, 불안하고, 다층적인 존재다. 내가 타인에게 보여주는 건 어디까지나 30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쌓은 사회적인 층위 뿐이지, 그 아래에는 너무나 복잡한 감정들이 숨어 있어서 가끔 이걸 미처 모르고 다가온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한다. 아주 최근에는 이런 감정들을 이해하지 못한 10년지기 친구와 절교하기도 했다. (절교라기엔 좀 애매한 상태로 끝내긴 했는데 아무튼 절교라고 하자.) 나의 부모는 그 누구보다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긴 하지만, 그 분들조차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는, 아니, 다가오기 싫어하는 부분들이 있다. 내 부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치관, 받아들일 수 없는 도덕관, 심지어 비난하기도 하는 감정들이 분명 나의 내부에 있다. 나와 내 부모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10년 넘게 싸우다가 서로 더 이상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고 받아들이고 타협했다. 그러면서 나는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었다.


성소수자라고 해서 이와 다를까?


성소수자의 사춘기는 얼마나 특별하고, 얼마나 평범할까? 성 정체성이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데 끼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그 영향이 지대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사람의 본질을 결정할 정도일까? 나는 여성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라던가, 이 글에 드러난 내 성격이라던가, 이 글을 떠받치고 있는 내 가치관들을 형성하는 데에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영향을 끼쳤을지 가늠하기가 힘들다. 내가 종교인(가톨릭)이라는 사실이 내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가톨릭 신자로 산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한 번 참을 걸 두 번 참고, 그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그 안에 오롯히 나를 위한 절대자의 안배가 담겨있으리라고 믿고 의연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줬다. 내가 문학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설명하기 쉽다. 책, 그중에서도 문학책을 즐겨 읽는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사람의 심리 변화와 성격을 흥미로운 관찰대상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했으며, 한 사람 안에 얼마나 다채로운 우주가 숨어있는지 짐작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내가 여자라는 사실은? 글쎄. 설명하기가 어렵다.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공중화장실에 갈 때나 목욕탕에 갈 때 빼고는, 여자라는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 깊이 고민해야 할 주제가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시대와 환경을 잘 타고난 이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에 태어나 2000년대에 사춘기를 보낸 여성들은 전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여성차별을 덜 받았으며, 여성이란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뺏기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수많은 손자들 가운데 유일한 손녀로서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경험이 있으며, 큰아버지들도 하나 뿐인 조카딸이라고 나름대로 아껴주셨다. 이런 나에게 여성이란 건 장점이었으면 장점이었지 단점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으로 태어난 사실을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00년대 중후반, 영국을 호령한 엘리자베스 1세도 자신이 여자라는 점을 이용해 신하들을 휘어잡았다고 한다. 조금만 자기가 불리해지면 “어떻게 여자인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하고, “나는 여자라서 그런 거 잘 모른다”라고 회피하며, 가끔은 “난 여자인데도 네가 바보라는 건 잘 알겠다”라는 식으로 면박을 준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이 경우, 여성이란 사실은 오히려 권력이었다.


즉, 상대적으로 관대한 시대와 환경이 나와 여왕으로 하여금 여성이란 사실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건 뭘 의미할까? 성 정체성이란 건 애초에 차별을 겪을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한, 인생의 본질에 큰 문제를 끼치지 않는다는 소리 아닐까? 성 정체성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로 급부상하게 된 것은 성 정체성에 대한 차별이 그 어느때 보다 심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진짜로 문제 삼아야 하는 건, 성 정체성이 아니라 성 정체성을 차별하는 사회, 문화, 제도가 아닐까? 그럼 나머지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고, 애끓을 듯 자책하고, 심지어 위험한 생각마저 품는 사람들도 결국 이 세상에 성 차별만 없다면 다 괜찮아질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많은 아픔을 생산해내는 문화를 기를 쓰고 유지해야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든다.


이건 내가 왜 가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강조하며 드러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기는지 설명해준다. 나는 성소수자들에게 전혀 유감 없지만, 가끔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의 원인에 “내가 성소수자라서 그래”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사람들을 유튜브에서 보면 참 싫다. “It’s because I’m a gay”로 세상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비슷한 결로, 자기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자길 차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유튜브 숏츠에서 봤을 때도 마찬가지로 불쾌감을 느낀다. 인생의 답을 너무나 쉽게 찾아내고, 너무나 간단하게 결론을 내버리는 그들의 단순함은 삶의 오묘함을 모욕하는 것 같다. 내게 인생이란 너무나 어려운 문제인데, 복잡하고 미묘하고 볼 때마다 색달라서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저들은 문제를 푼 것도 아니라 찍어놓고 “난 이 문제 풀었는데? 넌 왜 못 풀어?”하고 의기양양해하는 것 같아서 꼴불견이다.


이런 사람들은 차별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차별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인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차별을 자기 존재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차별이 사라지면 가장 힘들어하고 가장 납득하지 못할 부류의 인간들이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에 집착하며 모든 문제를 인종으로 귀결시키는 사람은,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발 붙일 곳이 없다. 더이상 자신이 인종 때문에 취업을 못한다고 변명하거나, 자신이 교육을 등한시하는 이유를 피부색으로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에 집착하며 모든 문제를 성 정체성으로 귀결시키는 사람 또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 자기 내면의 불안함, 우울함, 혼란, 그리고 기만을 변명해줄 핑계거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평등을 주장한다면, 그건 그 평등이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 놓고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평등을 바라는 사람은 인생에 한 가지 답을 내놓지 않는다. 평등을 그렇게 단순한 문제로 결론 내리지 않는다. 마틴 루터 킹도 흑인 인권 운동을 할 때 자신이 그리는 평등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15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내가 ~라서 그래”라고 단 한 마디로 함축할 수 있는 인간들은, 자기가 마틴 루터 킹보다 평등과 평화에 대해 더 잘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세상에 차별은 존재하고, 불평등함도 존재하며, 불공정함과 부정의도 존재한다. 이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지, 모두가 평등을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다 진심은 아닌 것 같다는 얘기다. 가끔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대중들 안의 성소수자 이미지를 끌어내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인권 운동을 하는 건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성소수자 축제 때 일부러 알몸을 드러내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라거나, 생식기 모양의 빵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 혹은 상대의 의사는 생각 안 하고 아무한테나 추근거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성소수자가 아니라도 지탄 받게 되어있다. 먼저 알몸으로 거리를 나돌아다녀놓고 정작 경찰이 잡아가면, “내가 성소수자라서 차별 받는 거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소수일 뿐이고, 같은 성소수자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대상일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차라리 미국에서 본 어느 동성애자 옹호 문구처럼 교양 있으면서도 절절하게, 간단하게 표현하면 되지 않을까. 내 평생 본 동성애자 옹호 문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이거였다. “군대에 있을 때, 내가 4명의 남자를 사살했다는 이유로 군은 내게 표창장을 줬다. 그리고 내가 1명의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강제 제대시켰다.” 인권을 주장한다는 건 이렇게 이뤄져야 한다. 현실을 무례하지 않게 비꼬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대중의 진심에 호소해야 한다. 지금까지 성공한 모든 인권 운동들이 그랬다. 성 정체성 관련 인권 운동도 성공하고 싶다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소수자들은 어디까지 이해받을 수 있느냐의 질문은 이렇게 뒤집을 수 있다. 이해 받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평범한 부부 관계에서도 서로에게 이해 받기 위해선, 우선 적절한 방법으로 자기 입장을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따라서 성소수자들도 사회에게 이해받기 위해선, 우선 적절한 방법으로 자기 입장을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방법이 뭐냐고? 글쎄, 그것이야말로 내가 성소수자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나로선 생각지 못한 기발한 방법이 그들에겐 있지 않을까. 상상력이 제한된데다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지도 않은 나로선 틀에 박힌 아이디어 밖에 안 떠오른다. 세미나라던지, 강연이라던지, 평화로운 집회라던지, 아니면 탄원서 제출이라던지…. 뭔가 방법이 있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역할은, 그 방법을 유권자로서 지지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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