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금하다 (4)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소수자의 인권을 주장하고 성소수자의 권리를 바로 세울 사람은 역시 성소수자여야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흑인 인권을 주장하고 흑인의 권리를 바로 세운 사람들이 흑인이었듯이. 따라서 성소수자들은 피해자이지만 움직여야 한다. 활동해야 한다. 피해자라는 이유로 몸을 웅크리고 숨죽여서 시대가 바뀌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소수자에게 가장 친근한 유권자조차, 성소수자들을 위해서 자기가 굳이 나설 필요를 느끼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만 해도 그렇다. 비록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내가 나서서 사회가 성소수자들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사명감은 들지 않는다. 그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학문적 호기심이 들 뿐이다. 나중에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이 성소수자인 걸로 드러나면 또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성소수자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다. 누군가에겐 죽고 사는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일단 ‘내가’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한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은 예부터 자급자족을 중요시 여겨왔다. 이는 어찌 보면 피해자에게 모든 사태를 알아서 지고 가라고 책임을 지우는 행위처럼 보이긴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피해자에게 상황의 주도권을 온전히 내맡긴 것이기도 하다. “알아서 하라!”라고. 그렇다면 이걸 기회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영웅의 자리는 비어있다. 누구든 그 영웅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물론 고달프긴 할 것이다. 영웅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을 테니까. 하지만 비어있는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는 것을, 누군가를 탓할 수 있을까? 수만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있고, 비어있는 의자에 누구 한 사람이 앉기를 기다리고 있는 광장을 상상해보자. 왜 아무도 의자에 앉지 않는거냐고 비난의 목소리가 잠깐 나오지만, 곧 묻힌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흐른다. 광장에 사람은 꽉 차 있지만, 의자에 앉은 사람은 1명도 없고 침묵만 계속되고 있다. 그 침묵에는 약간의 수치심이 묻어있다. 왜냐하면 비난한 목소리의 주인공도, 다른 나머지 광장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저 의자에 앉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걸. 의자에 앉지 않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스스로를 부족하게 여겨서.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어서. 의자에 앉은 뒤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알고 있어서. 가망이 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아서…. 그 이유 하나하나 모두 정당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이유들이 정당하다는 사실은 의자를 채워주지 않는다.
나는 말하자면 광장 밖의 사람이다. 그리고 광장을 넘겨다 보면서 흘끗흘끗 곁눈질을 하기 바쁘다. 왜 아무도 의자에 앉지 않죠? 의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누구인가요? 광장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한 명도 의자에 앉지 않는 거예요? 자칫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들을, 광장 밖의 사람인 주제에 나는 끊임 없이 묻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에 언젠가 성소수자 국회의원이 당선되길 바라고 있다. 또 대한민국에 성소수자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유능한 지도자라는 전제 하에 두 팔 벌려 환영할 의지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일단 광장에 누군가는 앉아야 하지 않겠는가. 광장 안에 있는 의자에 앉기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과연 광장 밖에 나와서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아니, 광장을 에워싼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내 살아생전 그 광장의 벽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나는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