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금하다 (6)
이 글을 쓰면서 가장 궁금한 건, 기독교인들이 내 글을 읽으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이다. 사실 성소수자들이 내 글을 읽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다소 걱정스럽기까지 한데, 기독교인들의 반응을 상상하는 건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일말의 기대까지 섞여있다. 기독교인들이 내 글을 읽고 납득한다면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 것이고, 내 글을 읽고 화를 낸다면 그건 그것대로 즐거울 것 같다. 왜냐하면 내 글이 무언가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 입장으로서 무반응만큼 무서운 건 없다. 그리고 기독교인처럼 대한민국에서 가장 예민한 부류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내 글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만큼 내 글이 무미건조하다는 뜻일 테니, 나는 그 반응에 펜을 꺾고픈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여준다면,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어도 내 글이 충분히 생기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것 같다. 그러니, 말 나온 김에 기독교에 대해 조금 얘기를 해보자.
나는 가톨릭 신자이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기독교라고 하면 교회에 다니는 개신교 신자들을 떠올리는 인상이 강하다. 사실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둘 다 포함하는 용어다. ‘기독’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즉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영어로 ‘크라이스트’(Christ)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때 기독교는 가톨릭만을 포함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약 500년도 더 전, 독일에서 루터라는 신부가 타락한 가톨릭교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황과 교황청을 타락의 주범으로 지목한 이후 기독교는 대변혁을 겪었다. (솔직히 이때는 그럴 만했다. 그 유명한 면죄부를 팔아 돈을 챙겨먹은 걸 생각하면 당시 교황청과 당대 교황은 신성보단 세속에 더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기독교는 ‘옛날 믿음’이라는 뜻의 ‘구교’와 ‘새로운 믿음’이라는 뜻이 ‘신교’로 나뉘었으며, 구교가 곧 오늘날의 가톨릭, 신교가 오늘날의 개신교다. 사실 개신교는 기독교라는 거대한 나무가 뻗은 가지 중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한다. 기독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래는 유대교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믿는 이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불합리성에 반발해서 새로운 종파를 새운 지도자이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자루에 담아야 한다”라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유래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위험분자로 취급해서 로마에 고발해버렸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의 고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했지만, 나중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사상에 감화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기관인 교황청이 세워졌고, 교황청의 우두머리인 교황은 오늘날까지 로마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이끌며 무엇이 사이비이고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 가르침을 내린다. 개신교는 교황을 인정하지 않으며, 유대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개신교, 유대교, 가톨릭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반목한다.
구태여 이런 얘기를 자세히 늘어놓은 건, 내 주변에서 어릴 적부터 교회 혹은 성당에 다닌 사람치고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독교 신자들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이 뭔가요?”, “성당과 교회가 다른 점이 뭔가요?”, “교황은 무슨 일을 하나요?”라고 물어보면 으레 배운대로만 대답한다. “우리는 진정한 신을 믿지만 저들은 아니란다.” 대단한 차이다. 참으로 명확한 설명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의 뿌리에 대해 탐구할 생각도 안 해봤으면서 무조건 배운 대로만 암송하는 것은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다를 바가 없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의 폐해에 대해서 모두가 입 모아 떠드는 건 자주 들어봤지만, 기독교의 주입식 교육에 대해서 비판하는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감히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한다. 기독교의 주입식 교육도 해롭기는 마찬가지라고. 모든 주입식 교육들이 그렇듯이, 기독교의 주입식 교육도 맹점이 있고 허점이 있고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진정으로 용기 있는 신자들이라면 그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약한 부분을 보호하는 지지대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약한 부분을 공격한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신자들이야말로 나서서 그 공격을 막아내고 굳건한 믿음으로 방어해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 약한 부분을 눈 감고 모른 척하기를 택한다. 그리고 다른 어린 신자들로부터 그 약한 부분을 숨기려고 애쓴다.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니 나날이 발전하는 현대 과학과 철학의 역사 앞에서 기독교는 날마다 작아지는 것이다. 스스로 부식되어감을 인정하지 않으니, 결국 부식된 부분을 돌보지 않아 부러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기독교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옛날 마르틴 루터의 분노를 인정하고 개혁을 추구한 가톨릭 신자들이 존재했듯, 이 부식을 인정하고 부식된 부분을 보강하고자 연구하는 지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마저 없었다면 기독교는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떠올렸을 때, 사과와 함께 바닥을 치고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고 쓸쓸하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 중 하나다. 비단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엄격한 기독교 부모가 성소수자인 자식을 인정하지 않아 내치는 사례가 흔히 일어난다. 이걸 어떤 저널리스트는 꽤 잔인하게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그 부모의 사랑은 조건부였다.” 기독교인으로부터 사랑 받기 위해서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성소수자가 아닐 것’은 그 조건 중 단연 1, 2순위를 다툴 것이다.
기독교인이 성소수자에 이토록 엄격한 이유는 성경 말씀에 남자가 남자를 여자와 하듯이 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남자 간의 동성애를 엄격하게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래, 성경엔 분명 그런 말이 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여자더러 남자와 하듯이 같은 여자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내용은 없다. 이 가르침은 오로지 남자에게만 해당된다. 그렇다면 레즈비언은 성경이 금지하지 않는다는 소리인가? 성경을 몇 번 읽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의문이 생겨나는 것이다.
내가 대학생 때, 교수님이시자 수녀님이신 분께서 성경을 가르치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성경이 쓰여졌을 당시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성서의 배경이 대부분 저 멀리 아랍 지방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 유명한 예루살렘도 중동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 중동 한 가운데에 있으니까!) 남성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최대의 모욕은 남성을 여성으로 취급하는 거라고 하셨다. 워낙 남성우월주의에 가부장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즉, 성경에서 “남자가 남자를 여자와 하듯이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은 엄밀히 말해서 동성애를 금지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타인에게 모욕을 끼치지 말라”가 그 가르침의 진짜 의미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왜 같은 성경에 “여자가 여자를 남자와 하듯이 하면 안 된다”라는 말이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물론 이게 그 구절에 대한 유일한 이론은 아니지만, 내가 느끼기에 충분히 유효한 이론이다. 그리고 이렇게 믿을 때, 기독교는 진정으로 사랑을 인정하는 이타적인 종교로 돌아온다. 박해하고, 단죄하고, 면박을 주는 종교가 아닌 내가 어릴 적부터 배워왔던 부드럽고 따듯한 종교 말이다.
무엇보다, 성경에서는 반드시 남성이 남성을 여성 대하듯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구절보다 더 많은 내용들이 있다. 예를 들어 무엇을 먹지 말라거나, 어떤 옷을 입으면 안 된다거나 하는 소소한 것에서부터, 그 유명한 십계명까지 있다. 그 중에서도 십계명은 어린 신자들이 반복해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배우는 규율이다. 나만 해도 어릴 때 십계명을 달달 암송해야만 하는 수업을 성당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 수업을 거쳐야만 어엿한 가톨릭 신자의 일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영성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는, 꼭 한국 사회 뿐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마저도, 십계명을 어긴 사람들한테는 참 관대하면서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할 정도로 잔인하다. ‘불륜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하나지만, 세상에 불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넘쳐나던가?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시길, 그 누구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범을 보이셨다. 그런데 세상에 남의 애는 물론이요 자기 배 아파 낳은 애조차 학대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 건 고해하고 뉘우치면 용서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성애는 용서가 안 된다? 내가 보기엔 모순덩어리 그 자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게, 나는 기독교가 모순덩어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를 믿으면서 성소수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모순이라고 하는 거다. 그들은 사랑과 이타심과 관용의 종교를 믿으면서 박해하고 타박한다. 그들의 사랑에 조건을 건다. 예수님은 결코 사랑에 조건을 건 적이 없으셨는데 감히 그 분을 따른다고 하면서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을 따지고 잰다. 일반 신도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도 가톨릭 교인이지만 가톨릭 신자다운 무한한 사랑과 관용을 베풀고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신을 위해 헌신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달라야 하지 않은가. 목사, 신부, 추기경, 교황, 장로, 집사, 이런 사람들은 일반 신도들보다 훨씬 더 이해심이 깊고, 따뜻하고, 너그러워야 하지 않나. 그런데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일반 신도들보다 만족시키기 더 까다롭고 어렵다. 그들이 더 무섭고 엄격하다. 이게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드는 건, 내가 의심 많은 신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심이 많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의심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정말 나쁘기만 할까?
하느님 앞에서도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자신 있게 미워하겠노라고 말할 수 있나?
나는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구경한 적이 있다. 그 흐린 날에 반쯤 안개에 싸여 있다가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서 안개를 거둬내고 드러난 둥근 천지는, 지금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거대한 자연이란 무릇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기 마련이라서, 수 천 년 전에 신의 손으로 빚어낸 그 커다란 호수는 나를 새삼 조그맣게 만들었지만, 나는 내 존재가 자그마해지는 걸 알면서도 반항심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긍하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숭고함 앞에서 조그마해지는 것은 전혀 굴욕적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하찮은지 깨닫는 동시에, 이런 위대함과 내가 한 공간에 공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가슴 시큰해지는 광경 앞에서, 나는 기뻤다.
천지보다 더 굉장한 구경을 한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올라가 봤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심해에 들어가 봤으며, 광활한 사막이나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협곡을 마주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각기다른 숭고함을 지금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내가 잠수부이고, 바닷속에 들어가 거대한 고래가 유영하는 걸 바로 곁에서 목격하고 있다고, 고래의 피부에 새겨진 상흔들과 따개비의 흔적까지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수영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앞에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인간이 같은 성별끼리 성애적 사랑을 나눈다는 게, 과연 생사를 걸고 탄압해야 할 만큼 심각한 오류던가? 내 대답은 글쎄, 아니올시다, 이다.
살아숨쉬는 고래 앞에서 앞으로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아낌 없이 베풀고 사랑하며, 오늘 본 광경을 영원히 기억하고 이 감동을 타인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할 수는 있다.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보고 애수 어린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맹세할 수 있고, 방금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듣고 그 자그마한 몸을 품에 안으면서 그런 감정에 젖어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고 베풀겠습니다. 선하게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라고 외칠 수 있다. 근데 똑같은 광경을 보고 “앞으로도 성소수자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엄하게 굴겠습니다. 그들에게 잘못되었다고 가르치고, 왜 그렇게 사냐고 소리를 지르고, 너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꾸짖겠습니다. 꼭 그러겠습니다, 신이시여!”라고 말할 수가 있나? 산과 바다와 하늘과 별과 고래를 눈 앞에 두고?
프란체스코 교황이 아직 살아계실 적에, 그분이 집전하는 한 예배에서 어떤 어린아이가 벌떡 일어나 예배당 안을 총총 뛰어다닌 사건이 있었다.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아무도 감히 일어나지 못하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 해맑은 어린아이는 눈을 반짝이면서 이리저리 뛰다가 마치 직감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프란체스코 교황을 향해 걸어갔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웃으시면서 그 아이를 안아주고, 다독이고, 안절부절 못하던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내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굴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하셨다. 아무 죄도 없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순수함으로, 처음 보는 세상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여유 있게 그 자리의 중심을 향해 총총 걸어가는 것. 그것만큼 대단한 행동이 또 있을까? 개선식, 개선문, 혹은 팡파르가 왜 필요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어여쁘게 보실 천국으로의 입성일텐데.
어린아이는 미워하지 않는다. 미워하더라도 며칠 지나면 누그러지고, 잊어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원한을 품기보다는 공포를 느끼며, 그마저도 가슴에 품고 살기보다는 즉각적으로 표출해 마음에 앙금을 남기지 않는다. 아이가 마음에 앙금을 남겼다는 것은 그 아이의 순수함이 깨진 것이다. 그 순수함을 깨뜨린 자들은 대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으로 입성하는 자들은 성소수자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참견이나 관심, 혹은 무지를 드러내서 성소수자들을 불쾌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의도라기보다 실수에 가까울 뿐, 절대 미움을 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걸 단죄하시키는커녕 어여쁘게 보실 것이며, 천국의 한 자리에 마땅히 그들이 들어와도 된다고 천사들에게 알릴 것이다. “여기, 내 아들의 가르침대로 사랑에 조건을 걸지 않은 이가 내 곁으로 돌아왔노라.” 이런 상상을 할 때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참된 신을 믿는다는 확신이 들고,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는 배움을 더 굳건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신 앞에서 나는 기꺼이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그 앞에서 얼마든지 꾸중을 듣고, 혼나고, 그리고 다시 사랑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비록 나는 죄 많은 인간이지만 신께서는 나를 사랑하실 것이기에.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없으니까.
이런 내가 기만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내가,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면 그럴지도. 근데 나는 아직까지 내 믿음을 흔들만큼 인상 깊은 논리나, 설교나, 웅변을 만나본 적이 없다. 태어난 이래 난 줄곧 가톨릭 신자였고, 가톨릭 신자로 죽을 것이다. 천국과 신을 의심한 적 따위, 단 한 순간도 없다. 지동설과 천동설을 처음 배웠을 때조차, 내 신앙은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지!”하고 생각했을 뿐, 흔들린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배운 신은 사랑과 실천과 초월에 대한 거였지, 과학이나 생물이나 어떤 화학 공식과 관련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옛날 찰스 다윈이 처음 진화론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진화론이 왜 그토록 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분노케했는지, 논리로는 납득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의아스럽다. 진화론이 득세한다고 해서 내가 내일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나눠주는 일에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닌데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정 분노해야 한다면, 그건 오직 그 누군가가, 우리로 하여금 남에게 베푸는 일을 가로막을 때만이어야 한다. 내일 내가 누군가에게 내 옷을, 내 먹을 것을,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는 걸 금지하면서 “그건 나쁜 일이다!”라고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화낼 자격을 얻는 거라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걸 베푸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막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성소수자들 중에서 적극적으로 베풂과 관용을 실천하는 이들도 많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함께 해야 할 동료들이다. 길고 고달픈 삶을 공유하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전진하는 길에 내내 함께할, 우리의 동포들이다. 우린 한 번도, 길을 달리한 적이 없다.
이쯤 되면 이제 나도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걸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논리에는 뭐가 있는지. 성경의 어떤 구절, 어떤 교리를 들고 성소수자는 기독교인과 함께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성경의 어떤 구절을 들고 와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교리를 들고 와도 내 믿음에 영향을 주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형이 되어주신 실천을 말하고 싶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걸 근거로 들고 오는 반박들은, 나와 대화가 될 리 없다. 나와 완전히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묻고 싶다. 교황님의 무릎에 앉아 두 다리를 동당거리던 아이와 똑같은 표정으로.
정말 내가 지옥에 떨어질 말들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