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H에게 (15)

나는 웃으며 살고 싶다 (1)

by 흔들리는별

<모던 패밀리>라는 미드에서는 베트남 이민자 출신 딸을 입양해서 키우는 게이 커플이 주연 캐릭터로 나온다. 아무래도 미국은 동성끼리의 결혼이 합법화되어있다 보니, 미드에서도 동성커플, 혹은 동성부부가 주조연으로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들을 보면 참 흥미롭다. 그런 캐릭터들이 유쾌하고 현실적으로 그려질 수록 더욱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유쾌하게’이다. 성소수자들이 우울하고, 고뇌하고, 절망에 빠진 게 아니라, 자기 잣대로 세상을 저울질하면서 조심스럽지만 유쾌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 이야기들이 나는 달갑다. 그런 것이야말로 현실이고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춤추듯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는 게 성소수자 커플이든, 이성애자 커플이든, 보기 좋다. 그리고 나와 가장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단어가 vivacity이다. 발음만 들어도 밝고, 명랑하며, 반짝반짝거리는 것 같은 이 단어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감각이다. 그리고 나는 이 감각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면 거기에 잘못된 건 없다고 강하게 믿는 편이다. 나는 성소수자들이 일구는 삶에 대해 직접 접해본 적은 없지만, 미디어에 표출되는 그들의 가정, 학업, 우정을 보면 굳이 ‘그들’, ‘우리’라는 선을 긋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이 그저 모두가 나침반 바늘의 방향을 ‘삶’과 ‘사랑’과 ‘행복’을 향해 놓고 있을 뿐, 차이점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되면 이제 성소수자들을 ‘그들’이란 카테고리에 넣고, 나는 ‘그들’이 아닌 다른 쪽 카테고리에 넣고 분류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뭐가 그리 다르다고? 그냥 똑같이 사람이고 지구인인데 뭐가 그리 달라서? 그냥 맘 편하게 모두를 인정하고 즐겁게 살 수는 없는지 순진한 바람마저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순진함을 표방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느냐”라고 호소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차별을 반대하는 쪽에 서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내가 배제하고 차별하는 편이었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라는 말은 매우 위험했을 것이다. 내가 왜, 무슨 권리로 멀쩡한 사람들을 이 사회의 위험분자라고 분류하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차별에 안주하겠다는 것과 같은 소리니까.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차별하는 태도를 유지하자는 뜻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라는 구호는 위험하다.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즐거운 삶을 추구하는 나의 바람과도 결과적으로 맞지 않다. 세상에 그 어느 반짝거리는 빛이 가만히 있던가. 빛이 반짝거리기 위해서는 여기저기로 튀어야 한다. 발랄하고 예측할 수 없는 운동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 나는 내 가치관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도 어딘가에 안주한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변해가는 세상에 맞춰서” 움직여야 한다. 걷고 뛰어야 한다. 그러다가 숨 가쁘더라도,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 상황 자체를 개그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함께하는 사람들도 웃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이 모든 게 즐거워질 테니까. 세상을 바꾸는 모든 운동이 꼭 웃음만 가득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웃으면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참 독특하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세상을 움직이는 운동들은 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각국 세계사의 혁명들, 독립운동들, 인권운동들을 생각해보자. 항의하고, 발을 구르고, 심각한 얼굴로 행진하는 사람들 얼굴은 쉽게 떠오르지만, 웃는 얼굴은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가깝게는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 분들이 계시지 않은가. 그들이 3.1 운동이나 항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웃으셨겠는가? 생각만 해도 불경하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성소수자 운동을 웃으면서 하자고 주장하는 데에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웃으면서 하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의 레인보우 퍼레이드 같은 걸 생각해봐도 웃는 얼굴들이 상당수이다. 그런 퍼레이드에서 주장하는 구호들도 행복, 웃음, 평화 등 긍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만약 성소수자들 가운데에서 투쟁을 부르짖으며 공격적으로 피켓을 휘두르고 군대식으로 행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그게 오늘날의 미국에서는 더 이질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성소수자 운동은 기존의 흐름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흐름에 편입되고자 하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항일 독립운동, 프랑스 혁명, 혹은 흑인민권운동 같은 움직임들은 기존의 흐름을 부수고 역행하고자 했다. 그만큼 불협화음, 폭력, 피를 각오할 수밖에 없었으며, 두 개의 상반된 흐름이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상황에서 웃음이 끼어들 틈 따위 없었다. 그런데 현재의 성소수자 운동은 오늘날 세상이 굴러가는 방향을 바꿀 의도가 없다. 오히려 함께 가세하고 싶어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21세기 성소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모니, 비폭력, 평화다. 미국에서는 성소수자 단체에서 전쟁 반대 운동을 펼치거나 총기소지 거부 시위에 동참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성소수자 운동 초기에는 물론 다른 인권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폭력과 싸움이 난무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정반대의 경향을 띠게 된 것은 그만큼 성소수자 운동이 발전했다는 뜻도 있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인정해주는 것이 대중적으로 옳다는 흐름을 타게 된 것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국민 다수가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인정해주는 쪽이 맞다고 인식을 돌리고 있다.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되고, 관련 연구도 활발하고, 미디어 매체에 성소수자 캐릭터가 제법 등장한다. 그런 곳에서 성소수자들은 거칠게 싸울 필요가 없다. 웃으면서 팔을 벌리고만 있어도 함께 마주 안아줄 사람들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땅에서,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고 목소리를 높일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성소수자들 운동이 간혹 평화롭지 않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성소수자들 문제가 아니라 나라 탓이다. 한국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을 주류로 편입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의 움직임이 주류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을 배척하면 할 수록, 그 불협화음은 점점 더 요란해지고, 치명적이게 될 것이다. 그 불협화음을 성소수자들 탓이라고 돌리는 건, 그들의 존재 자체에 딴지를 거는 꼴이 된다. 애초에 왜 그렇게 태어났느냐고. 왜 성소수자로 태어나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냐고. 그런데 그 성소수자들을 낳아준 부모가 이성애자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우스운 꼴이지 않는가? 내가 되도록 많이 웃으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런 우스움은 사양하고 싶다.


물론 웃으며 살고 싶다는 게 진지하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성소수자 문제는 진지하게 마주 대해야 할 문제다. 삶을 다루는 질문들 중 가벼운 건 없는 법이다. 일부러 가벼운 척할 수 있어도 말이다. 옛날 해골물의 원효대사께서 거지 옷을 입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던 것은 그분의 사상이 진지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길에 함께하길 바라서였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 문제를 웃으면서 얘기하자고 하는 건 진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벽을 세우지 말자고 하는 거다. 누구나 여기에 들어와서 합류할 수 있다는 제스처를 취할 수 있다면, 성소수자 운동은 더 커지고, 더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자유롭게 생각하면서 각각의 상황에 맞는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놓게 될 것이다. 더 풍부해질 것이다. 여기에 반짝거림이 가미되면서 결국 한 명, 한 명이 윤슬처럼 빛나는 거대한 파도를 이루게 될 것이다.


각각의 상황에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놓는다는 건, 우리나라가 성소수자들을 인정해주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다. 당최 우린 성소수자들의 상황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 그렇다고 또 함부로 물어보긴 뭐해서 서로 눈치 보는 와중에, 입을 여는 건 웃음이 아니라 조롱을 찾아다니는 무뢰배 족속들이다. 예컨대, 트렌스젠더 여성이 영화배우로 나오면 “쟤는 아래에 뭐 달려 있는 거 아냐? 달려있으면 아무리 겉모습이 여자래도 남자 아냐?” 같은 질문들이 댓글로 나오기 일쑤다. 여기에 나름 지식인인 체 하는 사람들이 “성염색체에 따라 성별을 정하면 된다. 그 외의 질문은 불필요하다”라고 선언하면서 모든 이견과 아우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분질러버리는 댓글들이 뒤잇는다. 사실 이런 식으로 댓글 쓰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인데, 지각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다들 뒤로 빠져 있다 보니 이런 조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처럼 보이는 게 현실이다. 그럼 지각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왜 앞으로 나서지 않는가. 연거푸 강조하건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기가 어떤 게 달렸는지에 따라 남성, 여성을 구분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성 염색체에 따라 성별을 정하는 게 일견 합당해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입 밖으로 대놓고 말하자니 그게 아니라고 반증하는 사람들(성소수자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댓글란은 결코 건전한 토론의 장이 아니고….. 그렇다 보니 이런 사람들은 침묵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물론 성소수자 당사자들도, 비록 속사정을 잘 안다고 하지만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집중포화를 당할까 봐 점잖게 못 본 척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 자체가, 지각 있고 교양 있고 싸우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리하다. 이런 댓글란은 물어보고 답을 탐구하는 장소가 아니라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쓰고 실시간 반응을 즐기는 도파민 수확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으레 이런 곳이 다 그렇듯, 자고로 자극적이고 수위가 강한 발언일 수록 더 높은 주목을 받는다. 이는 더 높은 도파민을 불러오고, 더한 자극과 상식을 뛰어넘는 수위를 가져오도록 악순환을 만든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진실을 찾길 기대하는 것은 푸세식 화장실의 똥통을 뒤지면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과정에 비길만 하다.


우리가 성소수자들에 대해서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데이트 약속을 잡는 상황을 콩트로 만들어서 연기하는 개그 프로그램들은 참 많다. 전형적인 여자, 전형적인 남자 캐릭터를 만들어서 서로 어떻게 카톡을 보내고, 서로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데이트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를 무대 위에서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런 개그는 여자에 대한 이해, 남자에 대한 이해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가능하다. 또, 미국에는 각 국적별로 캐릭터를 만들어 콩트를 짜는 경우도 많이 있다. 내가 최근 보고 가장 많이 웃었던 콩트 캐릭터는 라틴 아메리카 계열의 중년 여성이었는데, 아들이 백인 여자친구를 데려오자 처음에는 삐걱거리면서 납득하지 못하다가도, 아들의 여자친구가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올리겠다고 말하자(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가톨릭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다) 안색이 환해지면서 아들의 등짝을 두들겨 패는(“왜 쟤가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말 안 했어!”) 장면은 내게 있어서 압권이었다. 이 또한 라틴 아메리카 계열의 중년 여성들은 어떤지, 그들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화 충돌은 어떤 것인지, 이해와 경험이 동반하기 때문에 가능한 대본이었다. 성소수자들에 관한 콩트는 한국에 전무하다시피 하다. 입에 올리는 것도 신중해야 하고, 다들 눈치를 본다. 아니, 그전에 성소수자들에 대한 개그를 친다고 해도 그걸 이해하고 웃을 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이해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함부로 시도했다간 분위기가 싸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개그맨들은 감히 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나는 이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해하고 토론해야 한다. 받아들이고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조롱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조롱은 상대방을 구석진 곳으로 내몰고 다시는 앞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담금질하는 폭력이지만, 웃음은 가장 어둑한 곳에 숨어있던 대상도 환한 빛 속으로 데리고 나와 여기 머물도록 격려해주는 다정함이다. 포용이다. 한국의 성소수자들에게는 그런 포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웃음을 추구하는 것을 나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많이 웃을 수록 우리도 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고, 더 가볍게 받아들일 수록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 금 연재
이전 14화H가 H에게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