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H에게 (16)

나는 웃으며 살고 싶다 (2)

by 흔들리는별

웃자고 하는 시도가 가장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는, 자기가 대단히 웃긴 줄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아무래도 현대 사회는 재치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자신도 재치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너무 많다. 그리고 진짜 최악은, 자기가 진심으로 재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불필요하게 많다는 것이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요즘 자기가 재기발랄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나들기를 좋아한다. 물론 자기들 딴에는 선을 넘지 않도록 수위조절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제 3자가 봤을 때는 아예 불도저로 밀고 들어오는 수준이다. 유머에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자기가 재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선을 갖고 노는 일에 유달리 집중한다. 그것이야말로 유머가 불발됐을 때 모두의 분위기가 싸해질 수 있는 최악의 수인데, 자신의 유머가 실패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선을 넘을락 말락 하는 사람들도 사실 신뢰할 만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는 걸, 당사자들은 알려나 모르겠다. 말을 함부로 구사해서 웃음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과연 주변 사람들한테 평소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언어 자체가 그렇게 습관이 되어버릴 텐데, 위로가 필요할 때, 충고가 필요할 때, 다정한 대화가 그리울 때 그런 사람을 찾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도 유투브나 방송 같은 데에서 아슬아슬하게 무례한 발언을 하는 예능인들을 보면 웃긴 하지만, 저 사람들이 평소에도 그런 발언을 일삼을 거라고 상상하진 않는다. 인간관계를 다 끊어내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아주 솔직한 건 미덕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솔직함은 개성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덕이고 개성이 될 수 있는 솔직함이란 아주 드문데, 세상 사람들이 그런 걸 조금만 재주 부리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성소수자 관련해서 자기가 끝내주는 비유를 들었거나, 생각지 못한 반박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 없이 답답하다. 예컨대, 나는 동성애자를 페티쉬가 있는 사람에 비교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을 인터넷에서 수도 없이 봤다. 동성끼리 성욕을 느끼는 것이 용납이 된다면 어른이 아이를 욕망하는 것도, 심지어 사람이 동물을 욕망하는 것도 허용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했으면 싶었다. 동성애에 대해서 논할 때, 진짜로 중요한 것은 성욕이 아니다. 우린 이성애적 사랑에 대해서 논할 때 상대방에게 성욕을 느낀다고 하지 않는다.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성욕을 느껴서 줄리엣 없는 세상을 살지 않길 바랐다고 말하지 않고, 견우와 직녀가 서로에 대한 성욕을 견딜 수 없어서 칠월칠석마다 눈물을 뿌리며 오작교를 건넌다고 하지 않는다. 근데 왜 성소수자들, 특히 동성애자들을 유독 성욕이랑 연결 짓는지 그 논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알기로, 성소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결코 자신들의 성욕을 인정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당장 애인이 없거나, 애인을 만들 생각이 없는 성소수자들도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권리는 성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사랑의 문제이다. 동성애자들이 동성을 사랑하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라고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성애자들도 어쩌다가 자신과 몸 구조가 완전히 다르고, 문화적 습관도 다르고, 양육 방식도 다르고, 성(性) 가치관부터 정반대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지 설명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동성끼리 사랑하는 건 이성끼리 사랑하는 것보다 일견 더 논리적으로 보일 때마저 있다. 동성이라서 느낄 수 있는 유대감, 편안함, 나와 같은 성 가치관을 공유했다는 것에서 오는 든든함. 이걸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유아기 시절에는 성이 같은 친구들끼리 화장실도 가고, 함께 한 이불 덮고 자기도 하고, 옷도 공유하고, 심지어 서로 알몸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런 유아기를 거쳐 이성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굉장한 격변이고 뜻밖의 전환이다. 만약 지구인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외계인이 있다면, 어떻게 어릴 때는 동성끼리 그토록 돈독하던 인간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이성에게 성욕을 느끼도록 진화하는지 의아해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일단 자기가 재치 있다고 생각하면 내뱉고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언어들은 지극히 얇다. 다만 얇은 대신 베이기 쉽다. 그저 그뿐이다. 만약 칼날처럼 단단하고 예리한 논리라면 나 또한 지극히 걱정하겠으나, 고작 종잇장처럼 얇다는 것에서 오는 날카로움이 전부이기 때문에 걱정된다기보단 짜증 나고 경멸스럽다. 차라리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부정할 거라면 확실하게,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들고 나와서 이 문제로 골머리 썩는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단박에 평정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이 문제에 대답하는 것에 현대인으로서 어떤 사명감을 느끼지 않을 거고, 이게 장차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거라는 생각에 울퉁불퉁한 사유(思惟)의 계곡을 건너면서 힘겹게 논점들을 연결하려고 기를 쓸 필요도 없을 텐데. 누구는 이 고생을 해가면서 어려운 길을 가고 있는데, 기껏 말 한 마디 삐죽 던져놓고 “봐라! 이게 바로 나의 재치다!”하고 큰 소리 치면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심히 얄미울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입이라도 다물어 주면, 최소한 내가 가는 길에 방해는 되지 않을 텐데 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유머가 문화권마다 다르듯이 우리도 성소수자 이슈를 놓고 웃기 위해선 성소수자에 대한 우리나라만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유머를 가져오기에는 성(性)에 대한 미국의 이해와 우리나라의 이해가 너무 다르다. 애초에 미국에서는 흔하게 주고받는 농담이 우리나라에서는 패륜으로 받아들여질 때도 많고, 또 어떤 건 도대체 왜 웃긴 건지 이해가 안 가는 경우도 상당하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모던 패밀리>라는 드라마에서는 딸이 새로 사귄 남자친구가 게이인 것 같다고 의심하고 자기 남동생(게이)에게 판별을 부탁하는 가정주부가 나온다. 처음에 이 남동생이란 사람은 요즘 남자애들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행동도 부드러워졌다며, 겉으로 봐서 게이인지 알 수 있다고 하는 건 다 편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문제의 남자애를 실제로 만나보고선, 그 남자애의 말투와 행동을 보고 “쟤는 게이네”라고 백 프로 확신한다. 그런데 정작 그 남자애의 행동이란, 사진 찍을 때 포즈를 우스꽝스럽게 취한다거나, 말할 때 말끝을 길게 늘이는 것 정도의 사소한 행동들뿐이었다. 한국에서는 ‘끼 부리길 잘하고 동네방네 친구가 널려있는 인싸’가, 미국에서는 빼도 박도 못하는 게이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 외에 미국에서 “게이 같다”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들 중 대다수가 한국에서는 도대체 이게 왜 성 정체성과 관련된 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 투성이다. 사진 찍을 때 방정맞은 포즈를 취한다거나, 친구의 팔뚝을 찰싹찰싹 내리치면서 수다 떤다거나, 컵을 들 때 새끼손가락을 치켜세운다거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거나 하는 것들이 미국에서는 ‘게이’를 뜻하는데, 한국에서는 성 정체성과 무관한 평범한 습관들이다. (그래서 케이팝 아이돌들도 처음에는 서구 사회에서 인정받기 꽤 어려웠다고 들었다. 서구의 마초 상남자들께서 받아들이기에 대한민국의 아이돌들은 너무 게이 같았다나.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군대도 안 갔다 온 것들이 말은 잘한다, 싶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소수자에 대해서 마음 놓고 논할 수 있으려면, 우선 우리 문화에 맞는 이해가 앞서 만들어져야 한다. 미국 기준에 맞춰서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우리 식으로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우리나라 성소수자들의 삶과 일상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라야 한다. 이성애자들의 연애와 사랑과 희로애락이 각종 K-문화 컨텐츠로 제작되듯이, 성소수자들의 삶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다 함께’ 웃을 수 있다.


따지자면 한국은 성소수자에 대해 좀 더 공정한 이해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미국보다 더 용이하다. 미국은 기독교 기반 사회이다. 아직도 미국의 대통령은 성경에 한 손을 올려놓고 당선 선서를 하며,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은 무례를 넘어선 모독으로 비치는 사회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 점에서 미국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우리나라도 물론 기독교 인구 수가 상당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비난 및 비판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교회가 종교 단체가 아니라 개처럼 돈 쓸어모으는 기업이라고 하면서 ㈜님 혹은 개독교 같은 표현을 얼마나 흔하게 쓰던가. 이걸 두고 신성모독이라고 모욕감을 느끼는 사람은 욕 먹는 당사자 정도일 것이다. 만약 미국이었으면 그런 발언은 전혀 모르는 제3자도 진지하게 반박할 만큼 보편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어떤 정책을 세우거나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킬 때 “신의 뜻에 반하는 일이다”라는 식의 논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논리를 내세우는 정치인이 있다면 단박에 “또라이”라는 평을 받으며 손가락질 당했을 것이다. 일시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대중 – 옛날 콜로세움을 즐기는 로만인들 같은 - 의 관심을 받기야 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야당 국회의원에 1선으로 당선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리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한국은 기독교에서, 그리고 기독교에 만연한 성소수자 반대 정신에서 풀려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이유는 음양사상이 우리 문화와 사고방식의 뿌리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람, 아니, 동아시아인에게 세상은 음과 양으로 이뤄져 있고 이 둘이 조화를 이뤄야 만사가 형통하다는 사상은 해가 기울면 달이 뜨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래서 예로부터 여자는 음, 남자는 양이라고 불렀으며, 여자와 남자가 조화를 잘 이뤄야만 가정이 평안하고 더 나아가 천하가 평안하다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이는 그만큼 한국이 균형, 평화, 조화, 그리고 화합을 중시하는 문화를 형성하게끔 이끌어줬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 사람들을 뼛속까지 흑백논리의 민족으로 조직해 놓았다. 한국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사람은 ‘박쥐’ 같은 멸칭으로 불리며,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것은 내 편을 안 드는 것보다 더 치사하다고 보는 시각도 널리 퍼져 있다.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을, 한국 사람들은 싫어한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어려워한다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겠다.

이런 한국인에게 성소수자 문제는 참으로 난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은 성소수자에 대해 눈 감고 모른 척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폐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동성끼리 사랑을 하든 이별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기조가 오늘날 한국 사람들 사이에선 널리 퍼져 있다. 해당 문제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한, 한국 사람들은 관대하다. 모른 척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소수자가 전면에 나서고 뉴스와 유튜브에 해당 문제가 거론되는 순간, 많은 한국인들이 불편해한다. 여태껏 모른 척해온 것을 ‘참아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껏 참아줬더니 고마운 줄 모르고 날뛴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참아줬다’고 생각하기에, 전면에 나서는 성소수자들을 보면 자기들이 호구 취급 당했다는 기분에 휩싸여 분개한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네? 역시, 처음부터 참아줬으면 안 됐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성소수자들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단 한 번도 이쪽 편의를 봐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저쪽에서 마치 대단한 호의를 베풀었다가 배신이라도 당한 것마냥 화를 내니 어지간히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본질이 그렇다. 한국 사람들은 이미 사회가 충분히 성소수자들을 ‘용인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이 정도에 충분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사실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관대함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려운 문제를 당면할 용기가 없어서 벌인 비겁한 회피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다. 한국 사람이 흑과 백이 아닌 회색의 문제에 과감하게 맞서 싸우는 민족성을 가졌다면, 성소수자들은 오늘날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성소수자 이슈는 오늘도 암암리에 진행될 따름이다.


그나마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넓어지고, 다문화 가정이라던가 귀화 외국인 같은 ‘예외’의 경우도 늘어나고,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덕분에 성소수자 이슈도 조금씩 양지로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문제가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거대한 질문 – 인간의 성 정체성, 성 주도권, 성 평등권 등 – 에 빛을 쐬어주기엔 아직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일단 한국의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한국만의 이해 방식을 형성하는 것부터가 고난투성이다. 나만 해도 영문학 연구를 통해 서구의 시각에 빗대어 한국의 성소수자 이슈를 사유하고 있지 않은가. 보다 한국적인 이해가 만들어지고 한국적인 성 정체성이 이루어지기까지 장차 갈 길이 구만리, 아니, 구만리의 구만 배나 남았다.


그래도 재밌지 않은가? 서구 사회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문화적 기반 위에서 평등의 싹을 틔워야 하는 악조건을 겪었지만, 한국 사회의 토양은 그보다 훨씬 인심이 좋다. 음양조화라는 것도 결국 넓게 보면 갈등보다는 공존과 평화를 중시한다는 뜻이니 흑백에서 다색(多色)으로 조금만 팔레트를 다채롭게 만들면 되는 일이다. 물론 흑백의 토양을 다색으로 바꾸고, 이 다색의 토양에서 평등의 나무가 자라기까지 앞길이 구만리의 구만 배나 남은 건 사실이지만, 이 또한 일종의 지적 탐구, 혹은 모험이라고 생각하면 꽤 즐겁다. 그 길이 전쟁터가 아니길 빈다. 부디 인간혐오와 인간불신으로 점철된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보단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때로는 한숨도 쉬고, 짜증도 내고, 발을 굴러도,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순간들도 존재하는 길, 다시 말해 삶 그 자체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길을 기록으로 남겼을 때, 그 기록이 한 편의 시트콤을 이뤘으면 좋겠다. 후세대들이 그걸 보며 즐겁게 웃을 수 있도록. 만약 그날이 온다면, 그 웃음엔 분명 우리 세대에 대한 존경과 감탄 또한 서려 있을 것이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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