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1)
내 생각이긴 한데, 성소수자는 결코 소수도 아니고, 이성애자가 딱히 다수도 아닌 것 같다. 미국에서 퍼레이드 행렬을 하는 LGBT+를 보면 그 수가 엄청난 데다가, 평생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까지 염두에 둘 때, ‘소수’라는 표현은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LGBT+라는 표현도 꽤 묘하다. 그 많은 사람들을 기어이 카테고리별로 나누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이 사람은 L, 이 사람은 G, 이 사람은 B, 이 사람은 T….. 그러다가 이 4가지만으로도 감당이 안 되자 +까지 덧붙여서 억지로 가동시키는 이 분류 시스템은 한국 사람인 나로서는 잘 이해도 되지 않는다. 여자도 게이일 수 있고, 게이 여자랑 레즈비언은 같은 게 아니라고 어디서 들은 거 같은데, 이게 맞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여기에 무성애자 혹은 양성애자까지 고려하려고 하면 머리가 뱅글뱅글 돈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챕터를 구상하면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 본 ‘머메이드’, 혹은 ‘머피플’이라는 단어를 유독 많이 떠올렸다. 지금까지 봐온 카테고리들 중에서, 가장 폭넓고 다정하게 사회가 돌보지 않는 사람들을 정의하는 것 같아 마음이 끌렸다.
머피플이란 건 ‘인어’를 뜻한다. 원래는 수족관 같은 데에서 인어 꼬리 모양의 실리콘 지느러미를 입고 수중 퍼포먼스를 펼치는 직업군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미국에서는 어느새 그게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비록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만을 보고 정의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으나, 적어도 그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머피플’이 자신들을 포용하는 커뮤니티라고 굳게 믿는 것처럼 보였다. 머피플에 속하는 사람들은 워낙 다양해서 뭐라고 딱 규정하기 힘들지만, 분명 공통점은 있다. 기존의 커뮤니티에 속하지 못하고 내쳐진 자들이 머미플의 주요 인사를 이룬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의 피해자, 마약중독자, 양성애자, 동성애자, 그리고 마땅한 직업이 없는 젊은 층들이 스스로를 인어라고 정의한다.
한때 수족관에서 코스튬을 입고 공연하던 직업군이 하나의 정체성을 대표하기까지 어떤 변화를 거친 건지, 그 다큐멘터리에서는 자세히 정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다리 대신 꼬리를 달고 물속을 헤엄치는 인어가 어쩌다 사회에서 ‘낙오자’라고 부르는 이들을 칭하게 됐는지 납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두가 걷고 뛸 때 헤엄치겠다고 하는 사람. 모두가 뭍에서 살 때 물을 택하겠다고 하는 사람. 육지에서는 하염없이 무력하고 공격받기 쉽지만, 바다라는 특수한 공간에서는 자유롭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존재..... 누군가에게 버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끌릴 수 밖에 없는 설정이다. 내가 버림 받은 이유는 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내가 빛날 수 있는 장소는 따로 있다고 서사를 부여해주지 않는가? 비록 인어가 나오는 동화 중에 해피엔딩인 이야기는 별로 없어도, 그 비극성마저 자기가 버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희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보단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게 내게 주어진 수난을 받아들이는 데 더 용이하니까. ‘인어’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명 자기 삶의 비극성을 애써 마주하고 끌어안고자 노력하는 가상한 용기의 소유자들이다. 그 용기를 실리콘 꼬리와 모조 진주와 플라스틱 조개껍데기로 치장하는 건 조금 낯설어 보이긴 해도, 어쨌든 존중 받아야 할 용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머피플이란 용어에 끌린 것은, 기존의 사회로부터 배척된 사람들을 끌어안는 포용력 뿐만 아니라 그 말 특유의 유연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통념적으로 사회라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분명히 분리된 동시에 적대하지도 않고, 성소수자도, 경제적 빈곤층도, 심지어 약물 중독자도 차별하지 않고 포괄하는 그 탄력적인 힘은 우리나라엔 없는 거였다. 보통 기존의 통념에 어긋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를 만든다고 하면, 흔히 공격적이거나 분열적이거나 하다못해 기존의 사상을 슬쩍 베껴놓고 아닌 척 의뭉을 떠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머피플은 그렇지 않았다. 회복적이고 자체적으로 자생하는데다가, 독자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혹은 약물 중독자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스스로를 인어라고 칭하는 것에는 일종의 자랑스러움마저 느껴졌다. 자의적이지도 않고 가식 떠는 것도 아닌 그런 자랑스러움을, 사회로부터 배척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머피플은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용어였다.
심지어 그 용어가 함의하는 뜻마저 매력적이다. 머피플은 육지에 속하는 사람과 바다에 속하는 사람을 구분한다. 우리는 으레 바다 쪽에 속하는 사람들을 ‘소수자’라고 부른다. LGBT+를 성‘소수자’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바다가 육지보다 훨씬 더 광활하고 깊은 공간이라는 걸 생각할 때, 이 ‘소수자’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진다. 머피플은 묻는다. 누가 누구더러 소수자라고 하는 것인가? 수라는 건 상대적인 의미고, ‘그들’은 명명백백히 많은 수를 이루고 있다. 어쩌면 스스로를 다수라고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갇힌 후락한 부족민 신세일 수도 있다. 세상은 지금도 격변하고 있고, 그 격변은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도태되었다’고 표현하지 않던가? 도태되지 않으려면, 다수와 소수의 정의를 다시금 의심해봐야 한다. 이건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국적도 바꿀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어디에 적을 두고 있는지가 아니다. 그보단 내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보다, 나와 연결된 존재들이 누구인지 더듬어 가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더 중요하다.
퍼즐을 한 번 상상해보자. 그것도 명확한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복잡하고 추상적인 무늬의 약 3000피스 짜리 거대한 퍼즐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퍼즐을 맞추기 위해 일단 조각 하나를 집어들자. 하지만 그 위에 그려진 얼룩덜룩한 무늬만으로는 도대체 이 조각의 위치를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가장자리인지, 가운데인지, 혹은 그 어느 곳도 아닌 어중간한 곳인지 도통 갈피를 잡기 힘들다. 하지만 시간을 좀 들인다면, 최소한 이 퍼즐과 윤곽선이 맞는 다른 퍼즐 조각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조각도, 그리고 또 다음 조각도 그런 식으로 천천히 맞춰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게 처음부터 조각 하나를 들고 그 조각의 위치를 단박에 특정하려는 것보다 더 낫다. 퍼즐이 클수록, 그리고 그 위에 그려진 무늬가 복잡할수록 더욱 그렇다. 내 위치보다 나와 연결된 이들을 파악하는 것이란, 곧 이 머리 아픈 세상을 더 똑바로 마주하기 위한 방식과 통한다.
나는 말하자면, 내 눈앞에 보이는 퍼즐 조각 중에서 유독 푸른빛을 띤 퍼즐을 집어든 셈이다. 유심히 살펴보고, 내가 지금까지 맞춘 조각들과 잘 연결될지 가장자리를 더듬어보고, 혹시 앞뒤가 바뀌지 않았는지 실눈을 뜨고 관찰하기까지 하는 중이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푸른빛은 내 마음에 꽤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퍼즐 조각을 당장 멀리 던져두지 않고 좀 더 내 가까이 놔둘 생각이다. 원래 거대한 퍼즐을 맞출 땐, 마음 가는 대로 퍼즐 조각들을 몇 개 골라놓고 천천히 맞춰가지 않던가. 당장 쓸 것 같지 않더라도, 이 푸른빛이 워낙 아롱거려서 잠시 아껴두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연히, 아주 우연히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이 푸른 퍼즐이 내가 맞춰온 퍼즐들과 연결고리가 딱 들어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걸 행운으로 여길 것이다. 내 퍼즐에 텅 빈 공간을 두는 것보다, 이질적이더라도 꼭 들어맞는 조각을 맞추는 것이 내겐 더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끝끝내 퍼즐을 끝까지 맞추기를 거부하고 공백으로 남겨두기도 할 것이다. 그거야 그 사람들의 선택이지만, 나라면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퍼즐을 자랑스러워하진 못할 것 같다. 삶의 길이가 짧아서 주어진 퍼즐을 끝까지 다 못 맞출 수도 있지만, 적어도 두 눈 뜨고 퍼즐 조각을 내버리는 거랑 끝까지 노력하다가 아쉽게 공백을 남기는 거랑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단순히 퍼즐 조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버리고 미완성으로 두는 것은, 퍼즐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애와 같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용인될 수는 있지만, 반복해서 말하건대,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다.
한국에도 머피플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머피플과 같은 맥락의 우리만의 용어가 생겼으면 한다. 미국(해당 다큐멘터리는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은 워낙 땅덩어리가 넓다 보니 강도, 해변도, 수족관도 많아서 가짜 꼬리를 입고 수영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는 환경이라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새로운 커뮤니티를 창조하는 것이 더 적합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니 산과 관련된 용어는 어떨까? 아니면 무속신앙에서는 끌어올 만한 단어가 없을까? 뭐가 되었든, 그게 다정하고 여유 있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직 회복을 위한, 그리고 배척과 차별에서 벗어난 언어였으면 한다. 상처 받았지만 자유롭고 싶은 사람들은 미국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들과 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푸른 퍼즐 조각이 적당한 이름을 얻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