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4)
위에서 언급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곱씹을수록 가장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은 두 ‘에릭’에 대한 이야기이다. 해당 다큐멘터리에는 에릭이란 이름을 가진 성소수자 남자가 2명 나온다. 한 명은 흑인이고, 다른 한 명은 백인이다. 인종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환경 차이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들은 같은 이름이지만 전혀 다른 운명의 길을 걷고 있다. 나는 어쩌다가 같은 이름을 갖게 된,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이 어째서 저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인지, 내 주위에 성소수자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있다면 꼭 들려주고 싶다고 느꼈다.
흑인 에릭은 스스로를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non-binary)라고 칭한다. 이렇다 할 직업이 없고 가족들이 받아주지 않아서 부모한테 의탁하지도 못한 채, 인어 코스튬(그나마도 실리콘으로 만든 게 아니라 방수천과 글루건으로 만든 조잡한 것이다)을 입고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이 흑인 에릭의 직업이다. 당연히 정기적인 수입이 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해당 다큐멘터리를 찍을 당시만 하더라도 에릭은 집은커녕 방도 구할 수가 없어서 지인들의 집에 얹혀 사는 입장이었다. 자기 나름대로 SNS 계정을 만들고, 팔로어를 모으고, 음악을 만들며 성공을 꿈꾸지만, 냉정하게 말해 흑인 에릭에게 음악적 재능은 없어 보였다.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흑인 에릭이 만든 노래를 BGM으로 쓰고 공연 장면도 보여줬는데, 창의성 없는 가사에 특별할 것 없는 음색이 전부였다. 심지어 흑인 에릭도, 흑인인 것치고는 한국에서 흔히 상상하는 흑인 특유의 그루브라던가 소울이 부족한 것으로 보였다. 춤추는 장면이 조금 나왔는데, 움직임이 어찌나..... 뻣뻣하던지. 단시간에 흑인 에릭이 유망한 아티스트가 될 거라고 상상하기란 힘들었다.
백인 에릭은 이와 상반된 사람이다. 이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 남자 애인이 있다. 그리고 실리콘으로 인어 코스튬을 만들어 인터넷에 판매하고 있는데, 자기만의 브랜드 머테일러(Mertailor)를 창립해서 스스로를 머피플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아주 유명 인사였다. 게다가 해당 다큐멘터리 제작진들은 백인 에릭이 거대한 건물을 사들여 수족관을 설치하고 자체적인 수중 버라이어티 쇼를 주관하는 것을 제법 세세하게 담아냈다. 백인 에릭이 머테일러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자기 수족관에서 일할 수중 아티스트들을 모집할 때, 지원자 수는 상당했다. 그만큼 백인 에릭은 자기가 몸담은 세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위치를 차지했고, 목표가 있고, 목표를 실현할 수단도 있었다. 흑인 에릭이랑은 여러모로 달랐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굳이 두 에릭을 대조하지 않았다. 하필 두 사람의 이름이 같다는 것에 꽂혀 두 사람의 상반된 삶에 대해 거듭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 다큐멘터리의 제작 의도랑은 거리가 멀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분명 큰 의미를 시사하리라고 여겨졌는데,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두 에릭의 삶을 결정적으로 가른 것은 각 부모의 태도 차이였기 때문이다.
흑인 에릭은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한 마디로 내놓은 자식이었다. 경제적으로 곤궁해졌을 때 아들에게 알아서 잘 살라고, 부모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말라고 거절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들이 바비 인형에 유독 애정을 갖는 걸 못마땅해하다가 나중에 화를 폭발시키면서 아들의 방 안에 있는 인형들을 모조리 때려 부쉈다는 그 부모들은, 집안에 하느님 말씀이 적힌 액자와 천사 조각상을 모시고 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암시만 했을 뿐이지만, 흑인 에릭도 어렸을 때는 기독교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자라서 주말마다 교회를 다니고, 양복을 입고, 교회 신자들의 커뮤니티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였다. 이런 사람이 무엇을 계기로 자기가 성소수자라는 것을 깨닫고, 가출하고, 머피플 공동체에 들어가게 된 건지 다큐멘터리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아직 13살 에릭이 있습니다. 그 어린 에릭은 지금도 울고 있어요”라는 대사가 나온 걸로 보아,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흑인 에릭이 되지도 않는 싸구려 뮤직 비디오를 만들고, 재능도 없는 음악에 매달리고, 코스튬을 입고 길거리에서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며 푼돈이라도 벌려고 애쓰는 까닭은, 글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일찌감치 부모의 보살핌을 벗어난 게 가장 커 보였다. 흑인 에릭의 부모가 과연 아들에게 제대로 된 공부를 시켜줬을까? 대학은? 취업을 위한 직업 교육은? 하다못해 재능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과 시간이라도 투자해 줬을까? 흑인 에릭이 스스로를 바비 인형에 심취한 성소수자라고 고백한 순간, 부모의 모든 지원은 거둬졌으리라는 게 내 추측이다. 그리고 이 추측은 꽤 신빙성 있어 보인다.
해당 다큐멘터리에서는 흑인 에릭을 소개하면서 아주 짧게 몇몇 가지 낙서들을 보여줬다. 누가 그 그림들을 그렸는지 모르지만, 흑인 에릭이 직접 그렸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리고 그 낙서들은, 내가 그림을 조금 볼 줄 알아서 하는 말인데, 상당히, 아니, 꽤나 재능이 있어 보였다. 만약 그 낙서들이 흑인 에릭의 어린 시절 작품들이라면 흑인 에릭의 진정한 재능은 음악이 아닌 미술 쪽에 놓여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제대로 된 미술 공부를 했다면 나름대로 멋진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머테일러를 창립한 백인 에릭과 비슷하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인어를 재해석한 그림들을 내놓아 팝아티스트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자신만의 일러스트북을 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흑인 에릭이 가수로 성공하는 것보다, 이제는 지워지고 없어진 그 ‘만약’의 일러스트레이터를 상상하는 게 내겐 훨씬 더 쉬웠다. 그래서 흑인 에릭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나는 원래 예술에 퀄리티를 엄청 따지고 없는 재능을 있는 척 포장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편인데, 흑인 에릭의 이야기는 내가 골판지 왕관을 쓴 이 형편 없는 가수 지망생을 동정하게 만들었다. 아마 당사자는 결코 원치 않을 싸구려 동정이지만(그래, 흑인 에릭의 코스튬보다 이런 내 동정심이 더 싸구려라는 걸 나는 인정한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소모된 재능은 그저 말로만 들어도 안타깝기 때문이었다.
흑인 에릭에 비해 백인 에릭은 가족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과 지원을 받았는지 모른다. 물론 백인 에릭에게도 나름의 고난과 고충이 있긴 했다. 투렛 증후군 때문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백인 에릭은 속에 뭔가 불을 품은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자기 일에 자부심이 높은 만큼, 스스로에게 감히 타인을 경멸해도 될 자격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콧대가 높아 보였다. 아마 그 높은 콧대는 상처 받은 내면을 감추기 위해 높게 세운 벽인지도 모른다. 내 경험상, 스스로를 높이 내세우는 사람들은 사실 자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백인 에릭을 든든히 받쳐준 것은 부모님, 그중에서도 특히 할머니와 어머니였다. 백인 에릭은 어렸을 때부터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허락 아래 집에서 자기만의 마술쇼, 패션쇼, 서커스 공연을 벌이고, 수족관에 날마다 놀러 가서 그곳의 수중 아티스트들과 교류했다. 백인 에릭의 할머니는 손자가 만든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일에 기꺼이 어울려주었고, 어머니는 아들의 쇼와 공연을 비디오에 담았다. (그 비디오들은 넷플릭스 제작진들에게 넉넉하게 제공됐다.) 심지어 이 어머니란 사람은 아들이 개업한 수족관에서 일종의 총무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였다. 백인 에릭과 어릴 때부터 함께한 수중 아티스트들도 중요한 인물들로 조명되지만, 내가 무엇보다 집중한 것은 백인 에릭과 그 가족 간의 관계였다.
인상 깊지 않은가? 똑같이 성소수자이고, 똑같이 어린 시절에 아픔을 겪었고, 똑같이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한 명은 유망한 예술가이자 사업가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노숙자 신세에서 간신히 벗어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물론 수많은 변수들이 있었겠지만, 내가 직감적으로 “이거다!”하고 느낀 원인은 가족들이 그들을 받아줬는지의 여부였다. 부모가 받아주고 길러준 에릭은 머피플 커뮤니티의 존경 받는 일원이 되었다. 부모가 내친 에릭은 존경보다는 동정받는 게 더 쉬운 사람이 되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성소수자들도 얼마든지 백인 에릭처럼 주도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아서 확립하고, 그걸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는 재목을 갖췄다. 흑인 에릭도 한때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그들을 지지해줬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운명은 180도로 달라질 수 있다. 아무리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어도, 가족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물론 극소수의 확률을 뚫고 부모의 도움조차 바라지 않은 채 성공하는 성소수자들이야 있긴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얼마나 미약할까. 계산해 보는 것조차도 부끄럽다. 수많은 모래알 중 한 톨이 석영으로 이뤄져서 빛을 반사한다고 한들, 모든 모래알이 다 투명하게 빛날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천만 분의 일의 확률을 이겨내고 부모의 도움 없이 성공한 성소수자가 나타난들, 모든 성소수자들에게 부모가 필요 없다는 논리를 만들 수는 없다.
반복해서 말하겠다. 성소수자들에게는 부모가 필요하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겐 부모가 필요하고 성소수자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래서 부모에게서 내쳐진 채 방랑하는 성소수자들을 본다면, “진작 부모님 말 들었어야지, 괜히 반항해서 저게 뭐야?”라고 말할 게 아니라, “저 부모들은 대체 뭐하는 인간들이람?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망쳐놓을 수가 있지?”라고 부모를 비난했으면 좋겠다. 부모에게서 내쳐졌다는 말은 행동한 주체가 부모라는 소리다. 행동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말이다. 즉, 부모에게서 내쳐진 성소수자가 제대로 된 직업도, 거처도 찾지 못한 채 고생한다면, 그 고생 값은 부모 이름으로 달아둬야 한다. 아무리 흑인 에릭이 서른이 넘은 성인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어린 시절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서 허덕거리는 것은 온전히 흑인 에릭만의 잘못이 아니다. 마른 바닥에 물고기를 내버리는 것은 물고기를 풀어주는 행위가 아니다. 물고기를 품에 안고 바다까지, 아니, 최소한 물웅덩이까지는 걸어가 물속에 놓아주어야만 비로소 물고기를 풀어줬다고 할 수 있다.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다. 연을 끊는다고 해서 모든 책임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책임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단지 어린 시절 몇 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식이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할 몇십 년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모른 척하는 건 결코 “그걸로 끝”인 행동이 아니다. 자식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자식을 내치는 모든 부모들이 알았으면 한다. 그건 비극의 끝이 아닌,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을.
해당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는 두 에릭들 말고도 많은 머피플을 다뤘다. 나는 그중 쉐모니, 스파클, 레드리버 머맨, 사이렌 포드의 모르가나 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인터넷을 뒤져 확인해봤다. 각자 인어 일에 정착해서 잘 살고 있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찍을 당시 하고 있던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은 그때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흑인 에릭의 근황만은 확인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행여 자살했다는 소식을 발견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만큼 흑인 에릭의 삶은 위태로워 보였다. 불안정해 보였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서 흑인 에릭이 잘 살고 있다고 상상하면, 묘하게도 용기가 난다. 이렇게 불안한 세상에서 그처럼 기댈 데 없는 사람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면, 나도 이 땅에서 발 붙일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미약한 생각이 조심스럽게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흑인 에릭의 소식을 찾아보지 않고 마음 속으로 응원하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다. 그 사람이 부디 잘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음악으로 성공하는 것은 요원해보였더라도, 늦게라도 그림으로 먹고 살게 되었다던가, 아니면 지극히 단순한 일이라도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최소한 남의 집을 전전해야 하는 신세만은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 젊으니까 (살아있다면 아직 35살은 안 되었을 나이다) 언제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하늘도 내 꿈의 경계선이 될 수 없어요”라고 말하던 사람이니까, 보란 듯이 그 말대로 살아가라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그렇게 되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