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왕국의 승전탑
세 번째로 추천드릴 곳은 꾸뜹 미나르입니다. 꾸뜹 미나르의 '미나르'는 뾰족하게 높이 세워진 첨탑을 의미하며, '꾸뜹'은 이 첨탑을 세운 사람의 이름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꾸뜹의 첨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꾸뜹 미나르가 세워진 배경을 이해하려면 인도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본래 인도는 힌두 왕국의 차지였습니다만 8세기 무렵부터 이슬람 세력의 인도 침략이 시작됩니다. 북부 인도부터 시작해서 동진을 계속하던 이슬람 세력은 13세기 경에 이르러서는 델리까지 세력을 확장합니다. 델리에 있던 힌두 왕국을 정복한 이슬람 술탄(군주)인 꾸뜹은 힌두 사원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비를 세웠으니 바로 꾸뜹 미나르입니다.
꾸뜹 미나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도 관광꺼리는 이슬람 유적입니다. 앞서 소개한 타지마할, 후마윤의 무덤 등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이건만 각광받는 유적지는 대부분 이슬람의 유산이라니 좀 아이러니합니다.
꾸뜹 미나르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티겟 판매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해야 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바가지요금은 여전합니다. 600루피를 지불하고 입장권을 구매하고 꾸뜹 미나르의 입구로 향합니다. 간단한 몸수색을 마치고 입구를 통과하는데 인도인 한 명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인도인의 입에서 어눌한 한국말이 나옵니다.
"여기 가이드 필요해요. 여기 세계문화유산! 듣지 않으면 몰라요. 저는 정식 가이드예요. 잘 설명해 줄 수 있어요. 가격은 500루피! 가이드받아요!"
시간이 충분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최대한 여러 곳을 돌아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인도의 역사를 굳이 듣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가이드를 권하는 인도인을 뿌리치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멀리 삐죽 솟아올라 있는 첨탑을 향해서 몇 발자국 걷자 뼈대만 남아 있는 석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쌍의 돌기둥이 나열해 있고 그 위를 돌로 만든 지붕이 덮고 있습니다. 돌기둥과 지붕은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인도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입니다. 힌두 사원을 파괴한 자리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이라서 일부 구조물은 힌두 사원의 것을 재사용했다고 합니다만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곳곳에 남아있는 정교한 장식으로 과거의 호화로운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사원 앞에 있는 광장의 가운데에는 10여 미터 길이의 철기둥이 바닥에 서있습니다. 철기둥을 보니 처음 이곳에 왔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당시에 인도인들은 철기둥을 등지고 양팔을 뒤로해서 깍지를 끼는 자세로 철기둥을 안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인도인들은 저도 동일한 포즈를 취하라고 성화를 해대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 했었습니다. 기둥에 깍지를 끼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미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기억을 할 수 없기에 실제로 효험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아쉽지만 지금은 소원을 빌 수 없습니다. 철기둥 주위로 철로 만든 펜스를 둘러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대부분의 문화재를 손으로 만질 수 있기에 아쉬움은 배가됩니다. 아마도 철기둥 옆구리에 새겨져 있는 문구의 훼손을 방지하는 조치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설명문을 보니 산스크리트어이고, 힌두왕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꾸뜹이 정복하기 이전의 델리 왕조의 유물인 것 같습니다.
철기둥을 뒤로하고 십여 미터를 걸어가면 드디어 꾸뜹 미나르를 만날 수 있습니다. 높이 73미터, 지름 15미터의 원통형 돌탑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입니다. 웅장한 규모도 압도적이지만 표면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문양이 인상적입니다. 이슬람의 성서인 꾸란의 글귀와 기하학적으로 반복되는 도형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은 5단으로 되어 있고 안쪽에 설치된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폐쇄되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꾸뜹 미나르를 다 보고 사원을 통해서 반대편으로 이동하면 또 다른 미나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짓다가 미완성 상태로 남겨진 '알라이 미나르'의 흔적입니다. 첨탑을 짓고자 했던 술탄은 1층만 짓고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사후에는 공사를 계속하지 못하여 폐허로 변해버렸습니다. 원래 계획은 꾸뜹 미나르보다 두 배에 달하는 거대한 첨탑을 짓는 것이었다고 하니 만약 완공되었다면 얼마나 웅장한 모습이었을까요!
꾸뜹 미나르는 비교적 좁은 지역에 여러 유적이 몰려 있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는 여행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꾸뜹 미나르 하나만 봐도 이곳에 방문할 값어치는 충분합니다. 아쉽게도 저는 보지 못했지만 야간에 조명을 밝힌 꾸뜹 미나르는 더욱 아름답고 합니다. 근처에 계시다면 낮과 밤의 모습을 둘 다 즐기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