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장수 SF 드라마
어제 저녁의 일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디즈니 플러스를 켰는데, 닥터후가 프로그램 목록에 떡하니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웨이브와 쿠팡플레이에서 닥터후를 봐왔지만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온 것은 처음입니다. 더구나 기존에 방영된 시즌이 아니라 따끈따끈한 신작입니다. 후비안으로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시청을 시작했고 오랜만에 특유의 병맛 스토리에 흠뻑 빠졌습니다.
닥터후의 팬은 많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의 지인들은 닥터후를 잘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기몰이를 하지 못했지만 닥터후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방영되고 있는 SF드라마입니다. 무려 60년간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이 드라마가 방영을 시작한 1963년에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했고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으니 얼마나 오래된 시리즈인지 느낌이 오실 겁니다.
닥터후의 열렬한 팬인 저도 전편을 다 보지 못했습니다. 1963년에 방영을 시작한 닥터후는 거의 매해 새로운 시즌을 선보이다가 1989년의 시즌 26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방영을 중단합니다. 2005년에야 다시 방영을 재개해서 지금까지 13편의 시즌이 나왔는데 과거의 클래식 시리즈와 구분해서 뉴시즌이라고 부르며, 저는 뉴시즌을 봐온 세대입니다.
지금은 OTT로 언제든지 보고 싶은 시즌을 골라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KBS의 방영 스케줄에 맞춰 보는 것 이외의 시청 방법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인기가 그리 많지 않아서 매번 밤늦은 시간에 방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간 맞추기는 번거로웠어도 지금보다 더빙 품질은 오히려 우수한 시절이었기에 꽤나 만족하며 봤습니다.
닥터후는 시공간의 지배하는 종족인 타임로드의 마지막 생존자가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타디스라는 이름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면서 마주치는 각종 사건사고를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 종족인 달렉, 싸이버맨, 손타란 등의 단골 악당을 무찌르거나 빨대로 지구인의 피를 흡혈해서 지구인으로 위장한 외계 범죄자를 잡는 등의 다채로운 소재가 등장합니다.
컴패니언으로 불리는 지구인 동반자와 쌓아가는 우정도 이야기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닥터후는 결코 죽지 않으며 생명을 잃을 위기가 되면 재생성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인물로 변해서 삶을 이어갑니다. 시즌마다 새로운 배우가 닥터후를 연기하기 때문에 지루할 새가 없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다만 영원불사의 닥터후는 유한한 생명의 컴패니언과 헤어질 수밖에 없기에 반복적인 이별의 아픔과 상실감을 느껴야 하는 슬픈 운명을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명랑하게 행동하는 닥터후와 대비되는 우울함이 드라마의 전반에 깔려 있어서 매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닥터후에 등장한 여러 매력적인 인물 중의 하나인 캡틴 잭 하크니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 드라마인 토치우드는 이러한 우울증의 정점에 있는 드라마입니다. 스토리와 분위기가 너무나 우울해서 닥터후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시청을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이번에 소개한 닥터후 60주년 기념 스페셜은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이야기만 공개되었고 나머지 두 편도 차례대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스페셜답게 등장 인물도 화려하고 반갑습니다. 14대 닥터인 데이비드 테넌트와 그의 컴패니언인 도나 노블이 펼치는 활극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테넌트는 예전만큼이나 길쭉하고 날씬한 몸매를 선보이고 있지만 젊은 시절의 팽팽한 얼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자글자글한 주름살은 당황스러웠습니다.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고 주름진 얼굴에 적응하면서 어색함도 사라졌지만 시청 초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몰입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애정하는 닥터후의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두 편도 빨리 나오길 손꼽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