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디자이너의 유감
오랜만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신작을 발표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지난 4월에 발행되었다니 우리나라는 5개월 늦게 나온 셈입니다. 예약 발매 소식을 듣자마자 신청한 덕분에 일찌감치 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배달된 책을 집어 들었는데 두툼하고 묵직합니다. <기사단장 죽이기>처럼 두 권으로 나눴을 법도 한데 그러기에는 분량이 애매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도서 구매비를 아낄 수 있으니 고맙다고나 할까요.
혼자서 책을 한 권 만든 이후에 생긴 버릇은 책의 내용을 보기 전에 하드웨어에 먼저 눈길이 간다는 점입니다. 양장제본으로 만들어져서 튼튼하고 고급스럽습니다. 이전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와 <1Q84>도 하드커버로 기억하는데, 원고 두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책이라서 그런지 내지의 품질도 훌륭하고 글꼴도 눈에 잘 들어옵니다. 글꼴의 완성도와 가독성이 뛰어나기도 하고, 줄간과 행간을 세밀하게 조정해서 모든 글자가 정갈하게 배열된 느낌입니다. 흠잡을 데 없는 편집입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하루키다운 글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니 글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이야기를 쫓아가느라 바쁩니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지만 서구식 생활양식이 중심인 것도 여전합니다. 지명과 이름만 일본일 뿐, 재즈를 들으며 라즈베리쨈을 얹은 빵을 홍차를 곁들여서 먹는 이질적인 광경입니다. 책제목처럼 불확실하지만 초월적인 세계로 갔던 주인공의 복귀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틀여에 걸쳐서 다 읽은 소설책을 덮으면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되었는지 결론을 모르겠습니다. 누가 실재이고 누가 그림자인지, 언제부터 서로의 역할이 바뀌었는지, 그래서 그 둘은 제자리를 찾았는지 짐작조차 못하겠습니다. 앞선 주자만 열심히 따라 달려서 골인 지점에 들어왔는데 엉뚱한 곳으로 들어온 기분입니다. 어디부터 길을 잘못 들어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이것이 하루키입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아쉽습니다만 하루키의 글이 아니라 제가 해결할 문제입니다. 책의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모두 훌륭해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굳이 하나 옥에 티를 지적하자면 하드커버를 한번 더 감싸고 있는 겉표지의 인쇄가 잘못된 느낌입니다. 전체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서 인쇄되어 앞표지뿐만 아니라 책등의 로고도 중앙에 있지 못하고 살짝 밀려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받은 책만 인쇄 상태가 안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표지 디자이너라면 피눈물을 흘렸을 법합니다. 그 외에는 나무랄 데가 없는 잘생긴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