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길(지역사 연구가, 항일독립운동연구소 소장)
〇 양산 독립만세운동의 계기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시위가 서울에서 시작된 후 3월 11일에는 부산일신학교(日新學校)학생들의 독립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양산면(梁山面) 중부동(中部洞)에 살고 있던 엄주태(嚴柱泰)는 3월 12일 부산으로 나왔다. 3월 11일 일신여학교 학생의거 직후라 부산지역은 항일의 의분으로 긴장된 상태였다. 동래읍의 친척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3월 13일 동래읍에는 동래고보(東萊高普) 학생들에 의해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동래고보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인 엄진영(嚴進永, 1899~1947), 엄병영(嚴秉永,1902~1974)은 엄주태와 같은 종친이었지만 족보상으로는 관계가 없다.
엄주태는는 3월 12일(토)부산에 가 다음 13일(일) 동래에서 조선독립만세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독립선언서 1통을 습득하여 귀가하였다. 3월 14일(월) 선언서를 지침하고 양산공립보통학교에 가서 학교 운동장에서 전병건을 만나 선언서를 교부하고 독립운동 시위를 협의하였다. 전병건이 이에 동의하자 독립시위 방법과 수단은 다음에 만나 협의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3월 15일(화) 엄주태의 집에서 전병건과 협의한 후 복사지로 독립선언서 5통을 만들었다. 마을사람 박삼도와 이기수(李基洙, 이귀수李貴守)에게 독립선언서를 교부하고 독립시위 운동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목) 정오에 양산시장 장날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이귀수는 양산공보 동문이었다. 전병건은 양산공보 2회(1912.04~1914.03), 엄주태는 3회(1912.04~1915.03), 박삼도는 5회(1913.04~1917.03), 이귀수는 5회(1913.04~1916.10)였지만 동맹휴학 주도로 퇴학을 당하였다. 나이로 보면 이귀수(1898년생), 전병건(1899년생), 엄주태・박삼도(1900년생)순으로 나이도 1, 2살 차이였으며 학교 생활동 1913, 4년 같이 다녔으며, 당시 학생들이 많지 않았기에 서로 친밀함을 가지고 서로 왕래하며 잘 교우하는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병건과 엄주태는 사돈 집안으로, 전병건이 나이가 1살 많은 언양공보 선배였기에 엄주태가 편안하게 의논할 상대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당시 전병건의 부친은 전기준은 양산면장이었고, 숙부인 전석준은 양산군 참사였다.
엄주태(양산면 삼동 6통9호, 1900년 출생)는 엄우영(嚴宇永)의 3남으로 사립양산보통학교 출신으로 양산공보 2,3,4학년을 다녔다. 부친 엄우영은 의릉참봉(1901), 양산군 주사(1908)와 참사(1914),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1917)을 지냈다. 1906년 형인 엄신영과 같이 양성학교(養成學校) 설립에 동참하였고 1907년 양성학교(養成學校) 중흥에도 동참하였다. 부친 엄우영은 1914년 양산의 2류급 부호에 해당할 정도로 부유한 집이었다. 숙부인 엄신영의 장자인 엄주원은 1류급 부호로 1천석 이상의 부자로 1류급 부호인 상북면 상삼마을 김정훈의 매부(妹夫, 자형)이고, 전병건의 숙부인 전석준 역시 엄주원의 매부(妹夫, 자형)였다. 엄주원의 여동생(엄신영의 딸) 엄정자는 훗날 상해임시정부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과 결혼하였다. 이처럼 엄주태의 집안은 양산의 부호로서 혼맥 역시 든든한 집안이었다.
박삼도(양산면 삼동 5통4호, 1900년 출생)는 박동한(朴東漢)의 차남으로 서당을 다니다가 1913년 4월 2일 양산공보 1학년에 입학하여 1917년 3월 24일 4학년으로 양산공보 5회로 졸업하였다.
이귀수(동면 내송동, 1898년 출생)은 이용헌(李龍憲)의 장남으로 서당을 다니다가 1913년 4월 28일 입학을 하여 3학년까지 다니다가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1916년 10월 17일 퇴학을 당했다. 10월 5일 동맹휴학을 주도한 양산공보 5회 학생은 백용관, 곽방구, 우정선, 이귀수, 이덕수, 김원준, 나호연, 김덕성 등 8명과 6회의 최만수였다. 이들의 동맹휴학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원준(상북면 대석동 12통 5호, 1898년 출생)은 한문서당 출신으로 1912년 4월에 입학하여 결석 일수(234일 중 21일 결석) 문제로 1915년 5월 1일 퇴학 처분을 받은 뒤 다시 11월 12일 재입학을 하여 다니다가 1916년 10월 5일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3주간 정학 처분을 받았지만 개전의 정이 없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〇 독립만세 시위를 준비하다
독립선언서를 더 많이 인쇄할 필요가 있었다. 박삼도는 3월 19일(수) 오후 9시경 선언서 원본을 등사원지에 넣고 양산군청에 지참하여 (가서) 군청 일꾼 정주봉(양산면 북부동, 1901년생)에게 약 50통을 인쇄하여 받았다. 50통의 독립선언서를 장날 시위에 배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더 많은 인쇄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당시 종이를 인쇄할 곳은 관공서와 학교뿐이었다. 그래서 관공서 일꾼들이 독립선언서 인쇄를 담당하였다. 문제는 등사원지와 종이, 잉크를 관공서의 것을 사용하다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당시 전병건의 부친이 양산면장을 했기에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이용할 수 있아ᅠ갔다. 하지만 이것은 차후에 전병건과 부친이 함께 감옥에 갈 가능성이 있었기에 일단 군청비품인 등사기는 양산군청에 근무하는 정주봉이 몰래 가져오기로 하였다. 등사를 위한 제반 준비는 엄주태가 중심이 되어 하기로 한 듯하다.
정주봉이 등사기를 엄주태의 집으로 가져왔다. 당시 엄주태의 집은 군청과 가장 가까운 직선거리 160m 지점에 있었다. 3월 25일(화) 오후 5시경 엄주태의 집에서 전병건, 박삼도, 정주봉, 이귀수와 함께 조선인에게 반포할 목적으로 약 200통의 독립선언서, 부속공약서, 경고서 등을 인쇄하였다. 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기(旗) 1개를 만들었다. 박삼도와 정주봉이 1차 인쇄한 50통과 2차 인쇄한 200통으로 수백장 이상의 조선독립선언문과 공약서 등이 준비되었다.
이귀수에 따르면 인쇄는 25일과 26일 이틀동안 엄주태 집에서 하였다. 아마 등사기는 군청에 반납하고 몰래 반출하는 과정을 겪었다. 이귀수는 엄주태의 집에서 26일 숙박하고 다음날 바로 양산시장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엄주태는 형[엄주홍]에게 시위계획이 들통이 나 27일 시장에 외출금지를 당했다.
〇 3월 27일, 1차 시위
1919년 3월 27일(목) 전병건은 인쇄물을 엄주태로부터 받아 이기수(李基洙)에게 교부하였다. 3월 27일 엄주태를 제외한 동지들은 양산읍내시장에 독립선언서와 국기을 지참하고 시장에 군집한 다수의 조선인에게 배부하였다. 그들은 약 2, 3천 명의 군중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따라 부르도록 하였다. 엄주태는 시장에서 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듣고 집을 뛰어나와 시장에 가서 군중들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선동하였다. 이에 안덕원(양사면, 산막리, 농업, 22세), 강재호(양산면 호계리, 농업, 19세), 전병한(부산부 영주동, 농업, 19세) 등이 호응하여 만세를 크게 외쳤다.
3월 27일 1차 양산독립만세 시위에 대한 일본의 자료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3월 27일(음 2월 26일) 양산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약 2천 명의 군중에게 불온유인물[조선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하고 종이로 만든 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을 하였다. 군중은 양산헌병분견소와 군청에 몰려와 시위를 하므로 공포탄을 발산하여 주모자 5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군중은 여전히 해산이 안되고 다시 분견소와 군청을 기습하였으나 아무 일이 없이 해산되었는데 민심은 여전히 불온한 모양이었다. 경상남도장관은 수모자(首謀者) 20명을 검거[引致]하고 해산시켰다고 당일 5시 전보 보고하였다.”
다음은 독립운동사에 기록된 내용이다.
“일본 군경은 시위를 방해함과 아울러 군종을 구타하는 등 만행을 하고 주동 인물들을 검거 구인하였다. 노한 군중은 양산(梁山)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와 군청으로 쇄도해 갔다. 마침내 일 헌병은 건너편 우편소를 향하여 실탄을 발사하여 위세를 보이며 군중을 해산케 하려 하였으나, 노한 군중은 웃옷을 벗어 들고 우리들 전부를 구속하라고 외쳤다. 이때 주변 부락에서는 농악을 울리면서 사방에서 많은 인원이 몰려들어 정세는 더욱 험악하여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이때 부산에서 일본군 하사(下士) 이하 12명이 양산읍으로 파견되었다. 일본 헌병 분견소대장 오카다(岡田)는 드디어 실탄 발사를 중지케 하고 구속 주동 인물을 석방하면서 “구속 인사는 석방되었으니 여러분은 해산해 달라.”고 간청하므로 군중은 서서히 해산하였다. 일본 군경은 교활한 방법으로 이곳 군중을 기만한 것이었다. 이른 아침 이곳 군중이 잠자는 틈을 타 주동 인물 엄주태·전병건·박삼도·정주봉·안덕원(安德元)·강재호(姜存鎬)·전병한(全秉翰)을 구속하여 부산헌병대에 이관한 후 부산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이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데 가담한 이기수(李基洙, 이귀수李貴守)는 도피하여 체포되지 않았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당시 전병건의 동생 전병천(全秉天,1906년생)은 “양산공보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 시험을 치르려고 하던 날,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나 총성이 울려 사험을 중단하고 밖으로 나가보니 총탄에 맞아 넘어진 사람과 이리저리 흩어지는 군중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마 부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한 듯하다. “당시 형님이 양산 농민회의 주간으로 3ㆍ1운동 양산군 책임자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바로 그날 그 주동자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〇 4월 1일, 2차 시위
양산읍에서 3월 27일 1차 의거에 이어 4월 1일(화) 제2차 의거가 있었다. 즉 4월 1일(음력 3월 1일, 양산읍 장날) 오후 2시 수천 명[일 군경 기록에는 1천 5백명]의 군중이 주동 인물 검거에 격분하여 다시 양산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킨 후 그곳 일본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시위를 전개하고 오후 4시 일 군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할 수 없이 군중은 헤어졌다. 류경문, 이귀수(이상환李相煥) 외 1명(신원미상)이 검거되었다. 일본의 양산 2차 시위에 대한 기록은 간단하다. “4월 1일 양산군 시위 군중 1500명, 체포 구속 3명” 구속자의 명단은 없다.
이귀수는 4월 1일 시위로 검거된 사실이 그의 법원 판결문에 없다. 4월 1일 시위 구속자는 류경문(柳敬文, 경상남도 양산군 상서면 교리, 농업, 22세) 1명뿐이다. 류경문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 의사를 기초로 그 운동방법으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대정 8년 4월 1일 경상남도 양산군 읍내시장에서 (조선사람들이) 한국독립 시위운동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을 듣고 우리 양산에서도 운동을 할 생각으로 시장에 가자, 다른 사람들도 만세를 부르고 있어서 자신도 독립 만세를 부르고 헌병의 면전에서도 불렀다. 이러한 행위는 군중과 함께 한국독립만세를 부름으로서 공공의 안녕질서를 방해한 보안법 위반 행위로 검거되었다. 그는 1차 양산시위자들과 같은 날인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판결받았다. 그는 항소하여 1919년 5월 19일 최종 징역 6개월로 확정받았다. 이귀문과 류경문이 동일한 혐의로, 동일한 날짜에 체포되었다면 같이 재판을 받았을 것이지만, 재판 기록은 각기 다르다.
이귀수는 양산독립만세 시위 주모자 중에 가장 늦게 체포된 듯하다. 이귀수는 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3월 27일 시위와 관련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내용만 있을 뿐, 4월 1일 시위 혐의 내용은 없다. 항소를 하여 5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원판결 취소)을 최종 선고 받았다.
〇 재판 투쟁을 하다
일제강점기 재판은 항소를 하면 3심까지 받았다. 재판 과정은 사실에 근거한 형량의 결정을 하는 것이므로 사실과 법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한편 형량을 낮추기 위한 법리적 싸움을 동시에 하였다. 문제는 형량보다는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당시 주요한 재판의 경우는 신문에 재판 과정과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어 독립운동가들의 논리가 일반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것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각인시키는 재판 투쟁의 산물이었다. 만약 신문에 보도되지 않더라도 방청객에 의해 독립운동가들의 목소리는 그대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판 이전에 사법경찰관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 조서에 절대적 증거 능력을 부여하였다. 즉 일본에서는 수사 기관이 강제 수사로 얻은 심문 조서의 증거 능력을 예외적으로만 인정했지 만, 조선에서는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에 절대적 증거 능력을 부여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 경찰은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하여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엄주태가 색안경을 착용하고 있는 점은 아마 고문으로 눈 주변에 이상이 있음을 감투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통도사 양대응 스님도 고문으로 눈을 다쳐 색 안경을 착용하고 다녔다.
양산 1차 독립운동 관련자는 모두 3심의 과정을 거쳤다.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다시 공소를 제기하였다. 1심 판결에 대한 항소에 대해 1919년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은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의 법령이 바뀜에 따라 법 적용이 달라졌기에 원판결을 취소하였지만, 형량을 변함없이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경성고등법원에 다시 항소를 받았으니 1919년 7월 12일 공소없음으로 상고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3심인 대법원인 경성고등법원 판결문에는 양산 독립운동가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록되었다. 출판법 위반과 보안법 위반의 사실보다는 법리 적용에 대한 항소였다. 양산독립운동가들의 재판은 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 와타나베 도오루(渡邊暢, 1858~1939)가 담당하였다. 그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사법 체계를 수립한 인물이다. 3・1 독립 만세운동 이후 전국에서 만세운동에 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재판의 형량 기준과 관할은 내란죄인가 아닌가에 따라 좌우되었다. 내란죄라면 고등법원에서 그렇지 않다면 지방법원에서 결정되면 되는 것이었다. 와타나베는 “폭동을 수단으로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것을 교사한 것이 아니다.”라고 독립만세운동을 보았다. 결국 내란죄가 아닌 소요죄,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으로 대부분 처벌받도록 판결한 인물이다.
전병건은 보안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소하였다.
“보안법이라는 것은 사회의 안녕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혹은 해독을 주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법률의 효력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로 인정되는 조선인에게는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에 넉넉한 조선인은 국세(國勢)의 흥망에 따라 10년 전 일・한 병합이라는 명칭 아래에 고통과 불평의 막대한 총독정치를 감수했다. 무릇 인류는 항상, 발전의 존재이다. 세계의 수평선상에 있기를 바란다. 민족자결로서 독립만세가 일어난 것이고 생존권을 잃은 조선인 개개인이 갈망하는 바이다. 그리고 무지몽매한 두뇌로 민족사상을 주입했다고 해서 이것이 보안법 위반이라고 하니 이것은 소위 소하(蕭何), 한신(韓信)의 도(道)를 항우(項羽)시하는 것으로 어찌 물과 불이 서로 섞이지 않는데 보안법 위반으로 부칠 것인가?”
보안법이란 평온한 나라의 안녕질서를 문란함에 적용하는 법이다. 조선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이미 나라의 안녕질서가 문란한 상태이므로 독립만세 시위에 대해 보안법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즉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 살아도 안락함을 얻지 못하고, 군주가 없고 타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는 가운데 위로 관리로부터 아래 인민에 이르기까지 자유를 잃고 속박받은 생활을 10년 동안 했는데 이것이 문란함 그 자체가 아닌가. 유방과 항우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일본과 조선은 마치 물과 불과 같은 사이이다. 당연히 식민지 백성은 보안법 위반적 상황에 살고 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이므로 사회안녕질서를 위반한 것으로 볼수 없다. 조선인들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조선인으로 마땅히 행할 것을 했으며 이는 만국공법에도 위반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전병건의 주장에 와타나베(渡邊暢) 판사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박했다.
“다수의 군집에 대해서 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론 동작을 하고 치안을 방해할 것을 앞장서 이끌고[선도先導], 부추김[교사敎唆]한 것이므로 보안법 제7조에 해당하는 범죄이다. 보안법 위반이 아니라는 피고의 주장은 법은 피고 한 개인의 의견을 기초로 하고 피고의 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밖에 안되니 이유가 없다. 또 보안법은 조선인에 대해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논하나 그 역시 이유가 없다.”
피고인의 사실적 행위에 대한 보안법 법 조항의 적용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법은 한 개인의 의견에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 기초한 것이다. 또 보안법은 식민지조선인에게도 적용되는 법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전병건은 출판법 위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소하였다.
“출판법 위반이라 함은 부당하다. 세계 인류에게 공통하는 출판권이 조선인에게만 [권]한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출판 행위가 법률에 저촉한다고 하면 이는 무리한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출판한 그 물건의 글[書字]을 발[표]하여 사회에 죄악을 주었다고 하면 이 법률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물의 그 글[書字]은 조선인의 장애(障碍)인 마음의 영혼[心靈]를 잡[捉]고 인류평등과 다른 나라[異邦] 다른 민족[異族]을 알게 하고 조선인의 애국심을 양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출판법 위반으로 부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법률이 아니겠는가?”
출판권은 세계인류에게 공통된 권리인데 조선인에게 제한할 수 있는가? 조선독립선언서의 글은 식민지 조선인의 영혼을 사로 잡고, 조선인의 처지를 다른 나라와 민족이 알게 하고 나아가 조선인의 애국심을 양성하는 것인데 이것을 출판법 위반으로 하는 것은 법률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전병건은 항소하였다. 하지만 판사 와타나베는 출판법의 위반이고, 전병건의 주장은 한 개인의 의견에 불과하므로 “상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실재 독립선언서는 그 내용으로 보아 ‘국헌을 문란하는 문서’라는 것이 명백하게 판명되었기 때문에 출판법 위반으로 보았다. 따라서 선언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단지 그 요점만을 적어도 국헌문란 문서로 보았다. 또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등사판을 사용하여 인쇄하여도 출판법 위반으로 보았다. 나아가 인쇄와 등사의 방법이 달라도 등사기를 사용하였으므로 필기 방법에 의한 등사가 아니므로 역시 출판법 위반으로 판단하였다.
〇 양산 시위의 그 이후
양산의 독립만세운동은 양산읍을 벗어나 통도사와 울산지역의 언양과 병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양산 만세운동 관련자는재판과정을 거쳐 형이 확정되었다. 그들의 수감생활은 독립운동의 열의를 다지는 기간이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 감옥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생각을 익혀갔는지는 출소 후의 삶에서 알 수 있다. 엄주태와 전병건은 1920년대 양산 사회운동에 헌신하였고, 안덕원은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1922년 8월 25세로 청춘의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