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지대찰 통도사에 들어갈 때는
이병길(지역사 연구가)
일찍이 고려중기 명종 때 문신인 김극기(金克己)가 어느 여름날 통도사를 찾아 그 풍광을 보고 ‘통도사’라는 시를 지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날 개어 천 떨기 산을 열었는데,
한줄기 물이 흘러내리네.
놀란 물결 어지러이 얼굴에 튀니,
유월에도 가을 뜻 생기네.
한 발 숲 밖의 누각은
붉은 난간이 푸른 산에 비쳐있네.
그림 그린 대들보엔 제비가 말을 하고,
진귀한 나뭇가지엔 꾀꼬리가 졸고 있네.
어지러운 돌 높다랗게 하늘에 의지했고,
거치른 이끼는 어지러이 땅에 깔려 있네.
높다랄 손 율단(律壇)의 백(伯)이요,
물에 씻겨(戒水) 조그만 때도 없네.
그윽이 사노라니 푸른 것 밟지 않고,
글 삼천 귀절(三千指)만 내리외우네.
맑은 절경을 그릇 나누어 방탕하게 노는
이 사람의 마음 위로하네.
노는 사람의 행적 가벼우니,
문밖에 나면 만 리를 움직이네.
기이한 것을 탐하여 여기 머무르니,
그래도 백이나 만 중에서 하나 둘 밖에 보지 못하네.
그중에서 두 번 다시 오는 곳도 있으니.
숲과 구렁이 더욱 아름다운 곳일세.
옛날에 박후(朴侯)의 손자와 더불어 여기 올라 몹시 취했었네.
지금 와서 그때 놀던 것 생각하면,
황홀해서 마치 꿈속과 같네.
시험 삼아 왕파(王播)의 글귀를 찾아보니,
사롱(紗籠)이 이미 물에 빠져 없어졌네.
바람에 임해 긴 휘파람 부니,
옛일 생각하는 눈물 한없이 흐르네.
여기, 통도사는 국찰대본산이다
통도사가 있는 신평마을의 모든 길은 통도사 산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통도사 산문 입구에 도달하면, 돌기둥(석주, 石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석주는 신기하게 있다가 없어지고 자리도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습니다. 산문 입구에서 지금은 무풍한송 길 입구로 옮겨졌습니다.
석주 기둥의 동쪽 면에 ‘國刹大本山通度寺(국찰대본산통도사)’라고 적혀있습니다. ‘나라의 대표가 되는 큰 사찰 통도사’라는 의미이지요.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3일, 「사찰령」을 반포하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사찰을 근대화하기 위함과 동시에 자기들 손아귀에서 지배하기 위함이었지요. 7월 8일, 「사찰령시행규칙」이 조선총독부령 제84호로 제정 발표되면서 통도사, 범어서, 해인사를 비롯한 30개 사찰을 ‘본산(本山)’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본산’은 여러 사찰의 중심이 되는 사찰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찰의 중심이 되는 본산을 통제하면 그 아래의 다른 사찰들도 통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총독부가 각 종파(산문)의 본산을 통제함으로써 불교계 전체를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본산제도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본산의 중심에 주지가 있었습니다. 주지는 본산의 거대 권력자가 되었지요.
「사찰령」에 따라 과거 사찰에서 대중공사(大衆公事)라 하여 산중의 스님과 대중이 공론으로 사찰의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였는데, 이제 모든 일은 주지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님들의 민주적 자치가 훼손된 것이지요. 또한 주지가 총독부에 의해 인가됨으로 종교의 자율성이 사라지고, 총독에 의한 행정적 규제나 지도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불교계의 많은 스님은 사찰령을 반대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통도사는 초대 주지로 김구하 스님을 선출하였고 1911년 11월 7일 총독부는 「사찰령」 아래 30본산 주지 중에서 가장 먼저 인가하였습니다. 통도사는 1912년 9월 30일 「통도사본말사법」을 마련하여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개창한 불찰본산(佛刹本山)으로, 법맥은 청허(淸虛) 휴정선사(休靜禪師, 서산대사)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인 송운(松雲, 사명당, 교종)과 편양(鞭羊, 선종) 두 선사의 법계와 교통을 이어받은 설송(雪松) 연초선사(演初禪師)의 법통을 이었으며, 본말사의 주지는 환성(喚惺) 지안선사(志安禪師)의 법윤이어야 한다는 등 사찰 운영과 관련한 내용을 규정하였습니다. 당시 통도사 본말사는 모두 78개 사암으로 해인사 본말사 76사, 범어사 본말사 43사에 비해 통도사는 경남 3본사 가운데 가장 많은 말사를 거느린 대찰이었습니다.
‘국찰대본산통도사(國刹大本山通度寺)’ 돌기둥은 이러한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돌기둥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높이는 233cm, 너비는 35.7cm이다. 이 이정표는 원래 산문 앞 삼거리 부산식당 건물 가로등 옆에 있었지만, 산문 앞 통도사 관광안내도 옆쪽에 2008년 10월 옮겼다가 2022년 무풍한송길 입구로 옮겨졌습니다.
사찰에는 술과 오신채를 금하노라!
또 하나의 돌기둥이 2009년 봄 산문 근처 경기식당 앞 도로를 확장하면서 여의봉 쪽에 다시 세워졌다. 그러다가 2022년 무풍한송 길 입구로 옮겨졌습니다. 그 돌기둥에는 ‘山門禁葷酒(산문금훈주)’, 즉 ‘산문에서는 매운 냄새나는 채소와 술을 금지한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산문금훈주’ 돌기둥 뒤쪽에 보면, 세존응화(世尊應化) 2943년(서기 1916년)라 새겨져 있어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구하스님이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일제 시절 유산이라 시멘트로 연도를 지우려 했지만, 이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성숙해졌다고 봅니다. 일제시절의 역사 유산도 우리 것으로 품는 넉넉함이 있어야겠지요.
불교에서는 사찰음식으로 고기와 술과 오신채를 금지합니다.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오신채(五辛菜)라 하지요. 마늘과 파・부추・달래・흥거 다섯 가지입니다. 대부분 자극이 강하고 냄새가 많은 것이 특징이지요. 흥거는 미나리과의 식물로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식물이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대신 양파를 금지하고 있어요.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선재스님에 따르면, “오신채가 지닌 성질은 바깥으로 치닫는 힘이요, 들뜨는 에너지이다. 힘 자랑하는 사람이 힘으로 쓰러지듯이 흥분제 역할을 하는 오신채를 먹으면 자꾸 바깥으로 치달아 오히려 기력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고요히 마음을 지켜보고 내면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정신집중을 해야 하는 수행자에게 오신채는 적당한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승경전인 『능엄경』에도, “오신채를 먹으면 음란한 마음이 일어나고, 생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해진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일반인에게는 오신채는 영양가가 풍부하고 힘을 북돋는 강장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행자에게는 이들 식물의 성질이 맵고, 향이 강하기 때문에 마음을 흩뜨려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금지한 것이지요. 하지만 환자들에게는 건강회복을 위해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사찰음식에서는 이들 식물을 대신하기 위해 다시마, 들깨, 방아잎, 제피가루, 버섯 등이 사용됩니다.
사람에게 먹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하지만 스님들은 기본적으로 ‘빌어먹는 존재’였기에 음식을 가려먹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빌어먹기에 주는 대로 먹어야 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금강경』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진지 드실 때가 되었으므로 가사를 입으시고 바루를 가지시고 사위성에 들어 가시와 차례로 밥을 비시었다. 그리고 본 곳으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바루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걸식의 입장에서 밥투정, 반찬투정은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비록 고기를 준다고 해도 먹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스스로 해 먹는 입장에서는 다르겠지요. 결국 ‘무엇을 먹는가 보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기 불교는 음식 그 자체보다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무엇보다 강조했습니다. 그 마음가짐은 공양할 때 외우는 『소심경(小心經)』의 ‘오관상념게(五觀想念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이 음식이 나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덕이 들어갔는지를 헤아리고, 나의 덕행이 공양을 받기에 부끄럽지 않은가를 생각한다. 나쁜 마음 끊으려면 탐진치(貪瞋痴)) 끊는 게 으뜸이다.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육신의 고달픔을 치료하고, 보리도(깨달음)를 이루고자 이 음식을 먹습니다.”
(計功多小量彼來處 계공다소량피래처, 忖己德行全缺應供 촌기덕행전결응공, 防心離過貪等爲宗 방심리과탐등위종, 正思良藥爲療形姑 정사량약위료형고, 爲成道業應受此食 위성도업응수차식)
음식은 몸의 생명수요, 보약입니다. 고려 말 나옹 화상의 제자인 야운 스님(1376-1433)이 쓴 〈자경문〉에 음식에 대해 ‘농부와 소, 벌레를 수고롭게 해 나를 이롭게 한 것도 옳지 못한 일인데, 하물며 다른 목숨(곡물)을 죽여 나를 살리는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 선생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 했습니다. ‘하늘(천)이 낳은 것으로 하늘인 인간을 먹인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한울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한울이 한울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먹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먹느냐가 문제이지요. 그리고 자신을 먹고살게 해 준 세상, 천지만물, 천지부모의 은혜를 어떻게 되갚을 수 있을까(反哺之敎)가 문제가 됩니다. 모든 음식은 자연의 조화의 산물이니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불교에서 모든 욕망은 깨달음의 장애물로 보았습니다. 음식에 대한 마음의 절제, 즉 식탐(食貪)을 버려야 하겠지요. 불교의 삼독(三毒)인 성냄, 화냄, 어리석음(탐진치, 貪瞋痴)의 단절이 수행의 근본입니다. 식탐은 수행의 첫 관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통도사 앞 돌기둥은 우리에게 먹는 문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사찰의 음식문화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오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문화와 융합하여 변해왔습니다. 먹는 행위는 중요하지만, 어떻게 먹을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음식 역시 불교 수행의 한 방편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무엇보다 식탐은 자연을, 한울을, 인간을 괴롭히는 고통입니다. 오늘날 지구 위기는 결국 인간의 식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오늘 사찰에서는 식탐을 버리고 사찰 음식에서 생명의 존엄성도 배워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