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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길 Aug 30. 2023

양산, 한 바퀴 돌아볼까요(1)

-  삽량주, 양산의 이름과 지역을 알아볼까요

양산, 한 바퀴 돌아볼까요(1)


 -   삽량주, 양산의 이름과 지역을 알아볼까요


이병길(지역사연구가)


   

양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통도사일 것이다. 필자가 대학시절에   양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쓴 글을 지금에서 더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양산에서 세가지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 첫째는 양산 물금 취수장에서 정수한 물을 먹고 산다. 부산시 수돗물의 원수는 90% 이상 낙동강에서 취수한 것으로, 이곳 물금취수장은 부산시 전체 수돗물 생산 중 23%가량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은 물없이 살수 없으니 가장 큰 은혜이다. 둘째는 부산사람은 해운대 이외에는 대부분 양산에서 휴식과 여가를 지낸다. 동해 바다의 송정역을 지나 기장, 일광, 좌천, 월내, 서생으로 기차를 타고 해수욕장을 가고 회를 먹고 좌천 장안사에 갔다. 그리고 내륙으로는 낙동강을 따라 구포에서 물금역, 원동역, 삼랑진역까지 가서 놀았다. 무엇보다 통도사와 내원사, 그리고 천성산을 부산사람의 힐링공간이니 두 번째 은덕을 입었다. 세 번쩨는 태어나 사람은 반드시 주검이 묻혀야 한다. 그곳이 바로 솥발산 공원묘지, 석계 천주교 공원묘지, 어곡동 신불산공원묘지, 정관의 부산추모공원이다. 영원의 안식처를 양산지역에서 부산사람은 찾았다. 과거 양산지역이었던 기장과 정관은 이제 부산이 되었으니 그나마 부산 사람은 양산에 조금 미안함은 줄어든 것 같다.     


삼국시대 양산은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역으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낙동강의 물금에서 배를 내려 경주로 가는 길목이었다. 신라시대에 양산의 중심은 양산시립박물관 근처의 북정동, 신기동 고분 일대였다. 이곳에 삽량성(歃良城)과 신기동 성황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눌지왕 2년(418)때 상북면 소토출신 박제상(朴堤上)이 삽라군(歃羅郡)의 삽량주간((歃良州干, 삽라군 태수 또는 삽량촌장)이 되었다. 낙동강으로 들어온 왜인이 상륙하여 경주로 진입하던 곳이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삽량을 초라성(草羅城), 잡라(匝羅) 등으로 표기하였다. 자비왕 6년(463) 삽량성에 침입한 왜인을 벌지(伐智)와 덕지(德智) 장군이 물리쳤다. 문무왕 5년(665)에 상주·하주의 땅을 분할하여 [하주의 동쪽지역에]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다. 옛 하주지역을 거열주(居列州)라 했다. 문무왕 13년(673)에 삽량주에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축조하였다. 당나라 군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 있다. 

▲ 조선시대 <해동지도>, 양산군 지역


文武王 17년(677) 삼국 통일 후 9주(州)의 주치(州治)를 확정하고 신문왕 7년(687) 삽량주에 둘레가 1,260보(步)인 성을 쌓았다. 신기리 산성의 둘레와 유사하다.. 양산은 신라 문무왕 때(665년) 삽량주(歃良州)였고 경덕왕 때(757년) 양주(良州)라 했다. 양주에는 1소경(김해소경) 12군 34현이 예속되어 있었다. 양주(良州)의 영현(領縣)은 헌양현(巘陽縣. 현재 언양)에 있었다. 이후에 양주의 중심은 양산으로 이동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삽량주는 큰 고을, 중심인 고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뜻이 양주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 때 사용된 의춘(宜春) 역시 ‘큰 고을’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부친 김서현 장군이 진평왕 51년(629)에 대량주(大梁州, 현 경남 합천) 도독(都督) 또는 양주(良州, 현 경남 양산) 총관(摠管)이 되었다. 서현은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무력(武力)이다. 부인은 진흥왕의 친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현재 김유신 장군의 조부인 김무력 장군의 묘가 영축산 자락에 있다.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애장왕(哀莊王) 5년(804) 7월에 삽량주(歃良州)에서 서조(瑞鳥) 또는 길조(吉鳥)로 간주되는 흰 까치를 바쳤다.     


고려 태조 때는 양주(梁州), 조선 태종 13년(1413)때 양산(梁山)이 되었다. 고려시대 이후는 양산의 중심은 중앙동과 북부동이었다. 이곳에 양산읍성이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지금은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현재의 양산 중심지역은 예전에는 대부분 양산천 주변의 습지대였고 여름철 홍수로 강물이 넘처 흘러 농사를 짓기 어려웠다. 논농사는 현재 상북면 석계 지역에서 하북면 통도사 지역에 불과할 정도였다. 양산은 구포를 중김으로 낙동강을 통한 물류에 의해 경제적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현재 물금신도시는 메기들이 사는 뻘밭으로 메기들이라 불렸다. 현재의 양산시 주변의 주택지와 논농사 지역은 일제강점때 수리조합에 의해 매립되고 강둑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양산은 산과 홍수로 인해 사람 살기가 어려운 지역이었다.      


양산천의 물은 낙동강에 합류되어 부산 바다로 흘러단다. 예전에 홍수가 나면 물금 메기들의 뻘물의 누런 물이 흘러가는 낙동강 하류지역의 물길이 바로 황산하(黃山河)이었다. 현재의 양산 원동면 원동리 부근의 옥지연(玉池淵, 즉 가야진)으로부터 낙동강 하구 을숙도(옛 지명 취도) 부근까지가 황산하였다. 황산하가 곧 황산강이다. 현재 부산까지 황산강 유역이 예전에는 양산지역이었다. 낙동강변 길에 황산역이 물금에 있었고 황산 베랑길을 따라 서울로 가는 길인 영남대로가 있었다. 조선시대 황산강은 양산사람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청구요람(1834)> 중 양산지역

19세기 양산군은 북쪽의 하북면 통도사 지역에서 남으로는 황산강(낙동강) 강변으로 이어진 현재 부산시의 북구, 사상구, 강서구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양산의 경제는 구포를 중심으로 한 황산강 무역이 원천이었다. 당시 경상도의 돈은 구포에 다 모인다고 할 정도로 황산강(낙동강) 교역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1869년 양산군 구포면이 동래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구포를 양산 땅에 되돌려 달라는 복설(復設)운동이 벌어졌다. 양산사람들이 12번의 상소 끝에 마침내 서울 남산 봉수대에 봉화를 올리는 등 우여곡절이 있은 연후에 다시 1875년(고종 12) 구포는 양산군 좌이면에 속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부산(동래)과 양산으로 관할 관청이 바뀌다가 결국 1910년 이후 부산(동래) 관할 구역이 되었다. 1910년 이전 양산의 부호는 구포를 통래 부를 축적했고, 이 자금은 훗날 독립운동을 할 민족자본의 쌈짓돈이 되었다. 즉 구포은행과 백산상회에 투자하였다.    


양산지역의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양산에는 중앙에 천성산이 있어 동양산과 서양산으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자어로 양산(兩山)이라 착각한다. 동양산은 남북으로 울산과 부산 동래가 맞닿아있는 서창, 웅상, 덕계 지역이다. 조선시대 서양산은 통도사 지역에서 부산의 낙동강변 구포와 삼락동 그리고 김해의 대저도 양산땅이었다. 이 지역이 양산의 중심지역으로 현재는 낙동강 지역은 부산에 흡수되었다. 서양산은 다시 영축산에 의해 서양산과 배내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즉 양산은 천성산과 영축산의 양산이 있어 동양산, 서양산, 배내양산의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결국 산으로 인해 양산지역 사람들의 생활권은 각기 달라 다른 지역・사회・문화적 특징을 가지며 발달되었다. 양산은 삽량주, 양주 이외에 의춘(宜春), 순정(順正)라고 불리었다. 양산지역은 낙동강 지역, 동해안 지역, 울산 접경지역이 양산에 분리되거나 흡수되어 오늘의 현재 양산시에 이르게 되었다.     


양산은 그 이름에서 으뜸이 되는 중심 고을이다. 으뜸은 단순히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내용도 풍부해야 한다. 풍부함으로 발을 조금 내밀어 걸어가보자.     

   

▲ 양산시 관광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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