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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길 Sep 06. 2023

2. 언양읍성을 한바퀴 돌아볼까-언양읍성의 역사(1)

2. 언양읍성을 한바퀴 돌아볼까-언양읍성의 역사(1)  

- 이병길(지역사 연구가)

        

언양의 중심지에 울주 언양읍성이 있다. 언양읍성은 사적 153호(1966년 12월 27일 지정, 지정면적 4만 1,349㎡)로 언양읍 동부리 227, 224-4, 219-1번지 일대에 있다. 성곽은 정사각 형태로 전체 1,500m(면적 9만578㎡)이다. 읍성의 전체 모습을 보기 가장 좋은 장소는 화장산 굴암사 위 언덕이다. 그곳에 있으면 언양의 전체 모습을 마치 독수리같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언양읍성은 평지에 세워진 네모반듯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성은 사방의 길이 있고 북쪽 지역은 농사를 짓고 남쪽 지역은 주택이 있는 모습이다. 읍성 공간의 활동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 언양읍성의 증축 역사     


언양읍성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거지화현(居知火縣) 시절, 현재의 상북면 천전리 지역에 토성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1년)』 언양현(彦陽縣) 고적조(古蹟條)에 거지화현(居知火縣)은 “현재의 치소(治所)로부터 동북(東北) 5里(리)에 위치하며 토축을 쌓았는데 둘레가 3,208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언양을 기준으로 하면 서쪽이다. 거지화현의 읍성이 현재의 언양읍성으로 옮겨진 것은 고려 공양왕때였다.     

▲ 언양지역 <여지도>(연대미상)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 따르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성벽 둘레 1,427척, 높이 8척 규모의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며 군창(軍倉)이 있고 웅덩이[연못] 4곳과 우물이 2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1411년)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 객사(客舍)가 불에 타 다시 건축[修造]해달라.”는 내용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언양현에 보면, “언양현은 호수는 4백 21호, 인구가 1천 4백 58명이며, 읍 토성(邑土城)의 둘레가 157보(步)이며, 그 안에 우물 둘이 있다.”라고 하였다. 언양읍성은 흙으로 만든 성이었다. 157보는 5척 1보로 하면, 785척이고 6척 1보로 하면 942척이다. 즉 언양읍성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흙으로 만든 토성이 있었다. 그런데 문종 이후 성의 둘레 측정은 보(步)가 아닌 척(尺)이 사용되었다.    


조선 문종 1년(1451) 때에 각 고을의 성자(城子, 작은 성)를 확인해보니 법식에 따라 쌓지 않아 규칙과 격식[規式]에 맞지 않음으로 개축 또는 확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대두어도 되는 경상도 지역의 읍성 주위(둘레) 규모를 보면 경주부 읍성은 4천 75척, 김해부 읍성은 4천 4백 18척, 곤양군 읍성은 3천 7백 65척, 기장현 읍성은 1천 5백 27척, 동래현 읍성은 3천 척, 고성현 읍성은 3천 11척, 남해현 읍성은 2천 8백 6척, 하동현 읍성은 2천 9백 43척이었다. 평균 3,193천이었다. 

     

울산 울산군 내상성(蔚山郡內廂城)은 3천 7백 32척으로 개축(改築)의 대상이었다. 규모를 확장할 성 중에 언양읍성이 있었다. 언양현(彦陽縣)은 전에 본현 북녘의 산성(山城)의 터를 심사[審定]하니 다만 높고 험하여 역사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성안에도 역시 백성의 거주가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읍성 옛터[舊基] 1천 4백 27척에다가 이제 1천 척을 더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언양현 북쪽에 산성이 있다고 했으나 현재 어디인지 알수 없다. 현존하는 산성터는 언양 서남쪽의 천전리 산성과 영축산의 단조산성이 있다.    

  

세종 때의 둘레 157보와 문종 때의 1427척이 같은 길이라고 계산하면, 1보가 약 9척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444년 이후 조선은 고려 때 길이로 환원하여 주척 6척이 1보가 되었다. 즉 통상적으로 적용되는 척과 보가 언양읍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고려시대 1척 30.29㎝으로 1천 427척의 둘레를 계산하면 약 432m이다. 영조척 30.55cm로 하면 약 436m이다. 조선 전기 포백천 46.66㎝으로 하면 약 665m이다. 성종 20년(1489)에 축성 도체찰사(築城都體察使)가 하삼도((下三道)의 여러 포(浦)의 쌓은 성(城)과 여러 고을의 성은 포백척(布帛尺)을 기준으로 관리할 것을 건의하여 왕이 이를 수용하였다. 아마 이때부터 축성 및 관리 기준은 포백척에 따른 듯하다. 언양읍성은 평지였기에 1천 척을 더 확장할 공간이 있었다.    

  

〇 언양읍성, 석성을 쌓다    

 

『동국여지승람』(1481년)의 자료에 따르면, “읍성은 토성[土築]이다. 둘레 1천 498척, 높이 8척이다. 안에 우물 둘이 있다.” 1450년대 둘레 157보와 1,427척이었던 토성형태의 언양읍성은 중간에 공사를 하여 1,498척으로 71척이 늘어났다. 1451년의 1천척을 확장 공사 계획은 부분 확장으로 멈추었다.    

  

양산읍성의 경우, 1451년 문종 임금 당시 확장될 필요성이 제기된 양산읍성은 2천 950척이었다. 1492년 11월 “양산 읍성(梁山邑城)을 쌓았는데, 높이가 11척이고, 둘레가 3천 7백 10척이었다.”라는 보고가 있었다. 1451년 양산읍성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지 41년 만이었다.      

언양읍성 서쪽성벽 일부

언양 동헌은 성종 21년(1490년) 6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괄(鄭佸)이 말을 달려 와서 아뢰[馳啓]었다. 언양현(彦陽縣)의 관아(官衙)에 불이 났는데, 현감(縣監) 노종신(盧從愼)이 받은 병사 동원 신표[發兵符]도 불에 타버렸다고 하니, 개조(改造)해서 보내게 하였다. 언양관아가 불탐으로 개축이 또한 필요했다.

     

언양읍성은 1500년(연산군 6) 언양현감 이담룡(李聃龍) 때 이전의 토성(土城)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언양현 <성곽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新增) 홍치(弘治) 경신년(1500)에 석성으로 개축[石築]했다. 둘레 3천 64척, 높이 13척이다. 안에 우물 셋이 있다.” 『경상도읍지』(1832)에는 “경신년(1500)에 현감 이담룡이 돌로 고쳐 쌓았다. 둘레 3,064척, 높이 13척, 여첩 834첩이며, 안에 우물이 4곳 있다.”라고 가록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둘레 3,064척과 여첩 834첩, 우물 3~4곳이다. 여첩(女牒)이란, 성곽의 방어와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만든 성 위의 담을 말한다. 1450년대보다 1,637척이 더 늘어났으니 예상보다 약 600척이 더 증가한 것이다. 영조척으로 3천 64척을 계산하면 성곽 둘레는 약 936m였다. 조선 후기 포백천 48.8cm으로 하면 약 1,495m이다. 현재의 1,500m와 가장 가깝다. 결국 언양읍성의 둘레 척도 길이는 포백천에 의한 것이라 추정된다.                    


연산군때 석성으로 확장했을 때, 언양읍성의 형태가 지금과 같아졌다. 평지이지만 북은 조금 높고 남과 동쪽은 조금 낮아 남천에서 흘러온 해자 물이 자연스럽게 북에서 남과 동으로 흘렀다. 성의 남쪽의 길이를 그대로 두고 동과 서쪽 성곽을 확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정방형에 가깝고 사방에 성문을 두고 문밖에는 옹성을 만들었다. 문의 좌우와 성곽 모서리에는 성벽의 바깥으로 돌출시켜 덧붙여 쌓은 방대형(方臺形) 치성(雉城)을 설치하였고, 성 밖 사방에는 물 구덩이를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한 해자(垓字)를 설치하고 말뚝 나무[木杙]를 꽂았다. 성의 돌들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외벽의 돌은 크기가 들쑥날쑥하지만 1미터 이상의 큰 면석이 사용되었다. 

문헌에 나타난 언양읍성 측성역사
복원된 언양읍성 성벽과 남문인 영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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