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의 한 축인 영축산은 시살등 죽바우등 채이등 함박등이 연이어 있고 바위들은 병풍처럼 떡 버티어있아요. 계절이 바뀌면 산과들도 색깔들이 달라지지요. 양산의 영축산은 생각보다 사계절의 변화가 심하지 않은 듯합니다. 단풍은 잘 들지 않는 활엽수와 소나무가 많기 때문이지요. 단풍을 보시려면 가까이 다가갈 때 느낄 수 있겠죠. 역사적 인물들도 멀리서 보기보다 가까이 볼 때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인물이야 어디 변한 것이 있겠습니까. 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나무와 같이 사람들이 산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처럼 평가할 뿐이지요.
역사적 삶을 살았다는 것은 일단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평범하지 않음은 어릴 때부터 드러나지요. 혹 역사적 인물이 되시겠다면 어린 시절부터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하겠지요. 신화나 민담을 간직한 인물이 전근대에는 많았지요. 양산에 여러 역사적 인물이 있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아마 양산 출신의 이징옥 장군이라 생각됩니다.
○ 삼장수가 태어난 삼수리 마을
참, 양산 삼장수란 이징석(李澄石), 이징옥(李澄玉, 1399~1453). 이징규(李澄珪)를 말합니다. 이 삼 형제가 태어난 곳이 바로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입니다. 삼장수가 태어난 곳이라 마을 이름도 ‘삼수리(三帥里)’입니다. 삼장수 마을은 국도 35호선에서 하북면 진목마을에서 영축산이 있는 서쪽에 있습니다. 마을 주변이 예전에는 한가했는데 최근에 전원주택과 카페들이 들어와서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삼장수 마을은 아직은 예전과 비슷하네요. 한눈에 보면 장군이 태어날 장소라기보다 아늑하고 편안하게 살 선비 마을 같습니다. 다만 뒷산에는 영축산, 앞산에는 천성산과 금정산이 멀리 보이네요.
예전에는 마을 입구에는 삼장수 미나리 재배 비닐하우스가 있었지요. 지하 150m 천연암반수를 사용한 미나리는 싱싱하고 빛깔도 좋고, 몸속이 독소를 해소하여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선전했었습니다. 마을 도로명은 ‘장수길’입니다. 마을 입구 길 왼쪽에 삼장수유적비가 서 있습니다.
마을은 영축산 시살등에서 발원한 산자락과 접하고 있습니다. 통도사 앞산이라 절갓이라 부르고, 절갓 너머에는 장군약수로 유명한 옥련암이 있지요. 산자락 끝부분에 대숲이고, 그 동쪽 끝에 삼장수 생가터가 있습니다. 마을 앞에는 문전옥답의 드넓은 농경지가 펼쳐있고요. 마을 앞으로는 양산천이 흐르고 맞은편 경부고속도로 너머에 천성산과 내원사가 있습니다. 한눈에 명당이요 길지입니다. 마을은 점점 농경마을에서 전원주택으로 바뀌고 있는데, 명당인 삼수리 주변에 ‘통도전원마을’ 등이 들어서면서 전원주택지로 변모하고 있네요.
고려 공민왕 때 이전생(李全生)이 왕명을 받고 전국을 순찰하던 중 길지임을 알고 고려 우왕 6년(1380) 때 이곳에 정착하여 양산 이 씨의 시조로 3남 2녀를 두었습니다. 이전생의 아들 삼 형제는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으로서 최고 품계인 종일품에까지 오른 장군이 되었지요, 첫째 아들 이징석은 세조 3년에 양산군(梁山君)이 되었습니다. 양산이란 지명은 태종 13년(1413)에 양주군에서 양산군으로 개칭하면서 생겼습니다.
양산에는 세 장수가 나와 세월이 흘러 장수가 되었으며,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였으며, 절개를 지켜 나라의 은혜를 갚았다는 내용의 삼장수 민요(三將帥 民謠)가 전해옵니다.
“방아로구나 방아로구나 양산아 고을에 삼장수 났네(후렴)/ 햇님이 지면은 달님이 뜨고 달님이 지면은 햇님이 뜨네/ 날개가 달리신 용마를 타고 갑옷을 입으신 장수가 됐네/ 형님이 떠나면 동생이 오고 동생이 떠나면 형님이 오네/ 양남이 분어해 동남계 하니 일국의 간성이 제일문 됐네/ 나라님에게는 충성을 하고 부모님에게는 효성을 했네/ 호랑이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장군은 떠나도 이름은 남았네/ 열녀는 두 낭군 섬길 수 없고 충신은 두 임금 섬길 수 없네/ 금세지 난신 후세지 충신 여진족 받드는 황제가 됐네/ 어버이 보다도 스승의 은혜 선생님 보다도 나라의 은혜”
‘방아로구나’라는 구절을 보아서는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는 방아노래의 일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재 삼장수 생가터(장군길 13-10)는 대숲을 배경으로 동쪽을 향해있습니다. 아마 처음의 집은 남향집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보기에는 넉넉한 집안은 아닌 듯하지만, 직계 후손이 630년 넘게 살고 지켜온 명문가입니다. “양산이씨종손가 고문서”인 교지 등 종가문서 16점이 1989년 보물 제1001호 지정돼 보관, 전해져 오고 있었습니다. 보관의 어려움과 도난, 화재 등의 이유로 2012년 양산시립박물관에 기탁하였습니다. 그런데 2022년 또 집안에 보관된 많은 옛 문서들이 발견되기도 했지요. 집안의 오랜 문서를 세월의 풍파에도 간직한 삼장수 집안은 양산 기록유산의 집안입니다.
2017년 생가터에 갔을 때, 집 텃밭에서 양산 이 씨 종부인 신소석 댁(당시 94세)은 콩의 티끌을 바람에 까불고 있었습니다. 연세보다 정정한 편이었지만 귀가 어두워서 여러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여도 잘 알아듣지 못하셨는데, 모든 것은 아들이 잘 안다고 하셨지요. 다만 가난하여 아들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했고 대숲을 찾는데 3년의 소송이 걸려서 되찾으셨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때 40년 전에 이주해 사시는 마을 주민의 도움을 얻어서 장군샘과 갑옷바위의 위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장군샘은 마을 대숲에 있었지만 매몰되고 다른 샘이 대숲 옆 포장된 길 끝쪽에 뚜껑을 해서 보존되고 있었는데, 물은 콸콸 흘렀습니다.
○ 마을에는 삼장수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삼장수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삼장수의 태몽은 특이했는데요. 큰아들 이징석은 취서산(영축산)이, 둘째 이징옥은 원적산이, 셋째 이징규는 금정산이 가랑이로 들어오는 꿈을 모친이 꾸었다고 합니다. 태몽에 따라 이징석은 취봉(鷲峰), 이징옥은 원봉(圓峰),, 이징규는 금봉(金峰)인 아호를 붙였다고 합니다. 삼 형제가 어릴 때 하루는 서당에서 돌아오다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는 50여 명의 도적을 발견하고 삼 형제가 합심하여 소탕하니, 주변의 도둑들도 겁을 먹고 사라져 태평고을이 되었다고 합니다.
셋째 징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옵니다. 다섯 살 때 100kg이 넘는 논 돌을 업어다 집안에 가져온 돌이 아직도 생가 뒤꼍에 있습니다. 또 평소 입었던 갑옷을 바위에 보관했던 갑옷바위는 마을에서 500m 떨어진 소나무가 멋진 길가의 집(장수길 55) 왼편 마당에 있습니다. 바위는 마치 큰 바위 두 개를 포개 놓은 듯하고 높이는 약 3.5m 정도, 길이는 6~7여 m입니다.
막내 이징규(李澄圭)는 활쏘기를 즐겨했는다네요. 그는 어느 날 나라에서 받은 명마의 달리기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집 근처 활소대에서 활을 쏜 후 말을 달렸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화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살보다 늦게 도달한 것으로 생각한 징규는 그 자리에서 말을 칼로 베어 죽였답니다. 그런데 그때야 화살이 꽂히는 것이었습니다. 징규는 자신의 무지와 경솔함을 뉘우치고 말을 애도하는 비를 세웠는데, 지금 비석은 없지만 35번 국도 내원사 입구 용연초등학교 가기 전 삼거리의 ‘도마교(到馬橋)’가 그 장소라고 합니다. 현재 이 다리 옆에 새 다리가 생겼습니다. 마을에서 직선거리 2.5km입니다. 이징규는 젊은 날 부산 금정산 고당봉 근처 금봉탕(금샘) 앞에서 글공부하고 금정산 산상 평원에서 무예를 닦았습니다. 금정산과 이어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마애여래불좌상이 이징규의 자화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동면 계석마을에서 장군봉으로 가는 등산로에 수련할 때 타고 다니던 애마를 묻었다는 ‘말미(말무덤)’가 양산시 동면 석산리 둘레길에 있습니다. 긍정산 태몽으로 태어난 인물이라 금정산에 그의 이야기가 많이 있네요.
○ 4군과 6진을 개척한 이징석과 이징옥 형제
첫째 이징석은 세종 15년(1433) 서북 변방의 4군 설치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파저강 전투에서 도원수 최윤덕 장군의 부장이 되어 용맹을 떨친 수훈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세종이 내린 교지가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세조실록》에 “이징석은 나이가 70을 넘었는데도 과녁을 쏘는 것이 오히려 건장하니(세조 2년)”라는 구절로 보아 세조와 가까웠고, 활쏘기를 잘하였다고 합니다. 세조가 신뢰하고 아끼었던 신하였지요. 훗날 이징석이 죽자 세조는 용맹과 지략이 있고 세종 때부터 남쪽으로는 왜구를, 북쪽으로는 여진을 물리치는 등 국경 수호를 했다고 치하하며 직접 제문을 지어 보내고 장강(莊剛)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려주었습니다. 적(敵)을 제압해 이기고 지극히 강(强)한 것을 장(莊)이라 하고, 굳세고 과감(果敢)한 것을 강(剛)이라 한다. 이때 보낸 제문 역시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무덤은 양산시 명곡동에 있습니다.
둘째 이징옥은 6진 개척 정책의 일등공신으로 30여 년을 북방에서 우리 땅을 되찾고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선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케 하여 두만강 일대를 우리의 영토로 만든 일등공신이죠. 이징옥이 회령 부사가 되었을 때 야인(野人)들이 그 위세에 복종하여 10리 밖에서 모두 말에서 내렸다(《성종실록》 성종 24년)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여진족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삼 형제 중 이징석은 4군을, 이징옥은 6진을 세종 때 개척한 핵심적인 인물입니다. 오늘날 한반도의 국토 경계가 압록강 두만강으로 경계 지어진 것은 이 두 장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 이후로 강 넘어 국경선을 확장하지 못한 것은 조선의 사대주의와 영토 인식의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상중에도 국경을 지키도록 하여 삼년상을 치르지 못할 정도로 두 장군의 임무가 막중했습니다. 세종은 두 장군의 공을 잊지 못해 장군에게는 옷을, 부모에게는 여러 번 곡식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삼장수의 아버지 이전생은 1450년 9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는데, 당시 도승지 조유인(曹由仁)은 만사문(輓詞文 -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에서 “두 아들이 전 국경을 도맡아 지키니 한 나라의 울타리가 한 집 문 안에 있도다(兩男分禦東南界 一國干城在一門).”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중기 문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오산설림(五山說林)』을 보면, 이징석과 징옥이 열여덟, 열네 살 때 어머니가 살아있는 멧돼지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징석은 그날로 산돼지를 활로 쏘아 잡아 왔습니다. 징옥은 이틀 동안 산돼지를 쫓아 기운을 빼놓고 몰고 왔습니다. 두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여겨집니다.
이징석은 “청렴결백은 복 없는 사람의 별호”라고 말하면서 지방에 나갈 때마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점탈하여 탐관오리로 지탄받았고,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려는 이징옥을 상중에도 며칠 만에 겨우 일어날 정도로 때렸다고 합니다. 이징옥은 대들지 않고 그냥 맞았고요. 그는 이징옥의 난(1453년, 단종 1) 때 “평소에 동생과 사이가 나쁘고 내통이 없다.”라고 하여 석방되었습니다.
이징옥은 어릴 때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을 정도로 용맹했습니다.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에 분개했던 반(反) 사대주의자이기도 했고요. 여진족들에게는 “어금니가 있는 큰 돼지”라 불릴 만큼 덩치도 크고 성질이 굳세었습니다. 그는 청렴결백했고, 충성스러웠고 효성스러웠습니다. 문종 때 함길도 도관찰사가 이징옥의 고생을 보다 못해 “본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이 가산(家産)을 돌보지 않고 오랫동안 변방 수어를 맡았는데, 살림이 본디 가난하고 또 이제 아내가 죽은 지 이미 오래니, 누가 옷바라지를 하겠습니까?”라는 통서(通書)하였었다. 이에 문종은 “이징옥에게 의복 3벌을 하사하고, 가을에는 겹옷을 주라.”고 하교하였습니다. 이징옥은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했을 때에도 북방에서 근무했습니다.
셋째 이징규는 삼 형제 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활소대, 갑옷바위, 도마교, 말미 등. 그는 청백리로 유명했으며 두 형을 대신하여 향리에 자주 드나들면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습니다. 『단종실록』에 따르면, 그가 온천에 갈 때 수양대군이 잔치를 베풀고 배웅했다(단종 1년)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조 때 그는 명나라를 사신으로 여러 번 갔습니다. 그만큼 세조의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고, 창녕의 자택은 초토화되어 연못이 되고, 무덤의 장군석은 머리가 잘렸습니다. 후손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가 1987년 이천(利川) 이씨가 장군의 후손임이 밝혀졌습니다. 무덤은 현재 창녕군 장마면 유리에 있습니다.
○ 이징옥은 영웅인가 반역자인가
너무 뛰어났기에 경쟁심이 심했을까. 삼 형제는 계유정난과 이징옥의 난으로 인해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삼 형제는 모두 본관이 다른 삶을 살고, 후손에게도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일은 1453년 계유정난에서 비롯되었지요.
첫째와 셋째는 수양대군의 편이 되었지만, 둘째는 달랐습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는 계유정난을 통해 정권을 잡자,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북방개척 영웅 김종서의 부하였던 까닭에 이징옥 장군은 수양대군의 정적 제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종실록』, 『오산설림』, 『해동야언』 등에 따르면, 이징옥은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고 장차 오국성(五國城, 고구려의 국내성 자리)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하니, 야인(여진족)들이 모두 복종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중국과 동급인 황제를 칭했습니다. 그가 세운 나라가 옛 고구려지역이니 조선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지요, 만일 이징옥이 수양대군을 치기 위해 남하하지 않고 여진족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면, 조선의 국토 경계 또는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지금과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징옥은 금나라는 이름을 선택했을까요. 중국 사서에 따르면, “금나라 시조는 함보(函普)다. 함보는 고려에서 왔다『(금사·金史)』”. “금의 시조는 함보이고, 나라 이름이 신라 왕성 김 씨에서 비롯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청나라 사서 『흠정만주원류고』)”. “여진족 지도자는 신라 사람이다(송나라 문집 『송막기문』)”. 고려사에도 “금나라가 신라에서 비롯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만주원류고』는 “신라와 고려 국명이 왕왕 혼돈되게 쓰인다.”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징옥은 수양대군에 반역을, 혹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겠지요. 김종서로 인해 그의 역사적 선택은 달랐습니다. 수양대군 무리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부하였던 종성부사 정종(鄭種)과 호군 이행검(李行儉) 등의 무리가 이끈 자객들에 의해 오른쪽 팔이 칼로 떨어져 나간 뒤에도 한참을 대적하다가 결국 온몸에 화살을 맞고 죽었고 합니다. 역사는 배신자에 의해 더럽혀지기도 합니다. 죽은 후에도 이징옥의 시신은 찢기고 목은 효수되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18세에 갑사(甲士)로 군인이 된 이후 육진을 개척하여 함길도절도사에 올라 화이(華夷)와 야인(野人)들이 두려워한 이징옥은 대금황제의 꿈도 펼치지 못하고 결국 55세 죽임을 당한다. 혁명이나 개혁은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정치적 동지가 없다면 성공할 수 없지요. 정조 때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번암집(樊巖集)』에서 “대금황제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종 복위를 위한 거병이었다.”라고 보았습니다. 단종 복위를 위해 거병하고 대금국을 세운 탈사대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가 바로 이징옥 황제입니다.
이징옥의 난 이후, 조정대신들이 이징석과 이징규에 대한 처벌을 13차례나 상소했음에도 세조는 ‘홀로 불가하다’ 하며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그때마다 품계를 올려주었습니다. 계유정난 당시 이징석은 사냥을 하고, 이징규는 향리에 있어 계유정난에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공신으로 올려졌습니다. 세조는 이징옥을 두고 “지금은 반역한 신하이지만 후세에는 충신이라 할 것이다”(今世之亂臣後世之忠臣)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세조는 삼장수의 업적을 중시하였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징옥 장군이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심지어 본관까지 바꾸게 됩니다.
이징석은 본관(本貫)을 양산(梁山)으로 하여 세계(世系, 장강공파)를 이어왔으나, 차남인 징옥(충강공파)의 후손들은 근대에 양산 이씨에서 인천(仁川) 이씨로 환관(還貫)하였고, 징규(영산군파)는 영산(靈山) 이씨로 분파되었습니다. 역사적 선택은 때론 생존적 이유에서 합니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인간적인 선택이라도 역사는 때론 냉혹하게 평가합니다. 배신자!, 반역자!, 충신! 이징옥은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습니다.
이징옥과 두 아들은 함께 살해되었고, 연좌제로 딸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8살이었던 막내아들 연원(淵源)만이 유모의 등에 업혀 경상북도 경주 토함산 서편 아래 상신곡에 숨어들어, 은거하여 이름을 태엽(台燁)이라 바꾸고, 본관을 초계(초산草山)라 칭하고 세계(世系)를 이어갔다가, 그의 후손들은 순조(純祖) 때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유모의 무덤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2-7에 있습니다. 상석에 “贈禮曹參議仁川李公諱潤源又諱台燁乳母之墓(증예조참의인천이공휘윤원우휘태엽유모지묘). 죽어서 예조참의 벼슬을 받은 인천 이씨 윤원 혹은 태엽이라는 사람 유모 무덤.”이라 적혀있습니다. 그녀 이름은 없습니다. 그저, 유모(乳母)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로 인해 이징옥의 후손이 있게 된 것을 보면, 역사에서 혈통의 보존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오늘날 이징옥은 유모로 인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겠죠.
○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일은
한 마을에서 삼 형제가 장수로 성장한 일도 드물지만, 전설 같은 다양한 이야기를 남긴 것도 드물지요. 삼잔수는 탄생과 달리 그들의 묘지는 각각 다른 곳에 있습니다. 양산시에서 삼장수를 관광 상품으로 활성화하기도 했습니다. 삼장수 가장행렬, 삼장수 기상춤, 삼장수(삽량) 빵 등등을 하였지요. 필자도 2015년 “잃어버린 별, 영웅 이징옥” 뮤지컬을 기획하고 양산, 부산, 창원에서 공연하였지요. 요즘 삼수리 마을은 장군의 용감무쌍한 전설을 들을 아이들 소리가 없습니다. 조용하지요. 마을은 삼장군의 놀이터에서 점점 전원주택지로 바뀌고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일은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그들을 기억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적 일회성 행사보다는 마을 사람이나 지역민들이 오랫동안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통해 교훈을 얻도록 지속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