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 and Out
이따금 찾아오는 공허감이 있다.
무기력함과 동반되는 이 공허가 오면 무언가를 하기에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평생에 걸친 딜레마라고나 할까.
원하지도 않았지만, 항상 날 찾아와 주는 이 공허는 도대체 어디서 올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디서, 왜 찾아와 나를 가두는 것인가 그 이유가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유만 찾아내면 언젠가 그 가두리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와 풍족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가 가장 자주 찾아오는 시간은 번아웃이 왔을 때다. 항상 온 열망을 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문득 사라지면, 혹은 그 열망의 대상이 온전해졌을 때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렇게 몰입하고 온몸을 내어 쏟아내던 일들도 느닷없는 미시감과 함께 조금씩 사그라든다. 언제 그렇게 불타올랐냐는 듯 허연 세상에 재만이 남게 된다. 그 순백의 공허감을 어찌 형용할 수 있으랴.
무언가에 빠지면 그 대상이 일이 되었든, 행위가 되었든, 사물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그들을 내 안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담아낸다는 행위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 근본을 찾을 때까지 계속 퍼내고 담아낸다.
눈으로 한번, 귀로 한번, 손으로 한번, 눈으로 또 한 번.
온 마음을 이루어 내가 담아낼 수 있는 그 끝에 다다르고, 더 이상 내 열망을 건넬 수 없을 만큼 퍼내면 그 순간 미시감이 찾아온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게 무의식을 동반했던 내 상황을 돌아보게 된다. 무엇을 위해 내가 이렇게 몰입했고, 과연 무엇이 좋아서 이렇게 빠지게 되었을까… 그렇게 하나하나 멀리 떨어져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걸어온 그 길 끝에 내 모습을 발견하면 바로 그때 공허가 찾아온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사랑할 때 그들을 담아내기 위해 나도 모르게 담아온 공간에 나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흘러간 시간만큼 방대해진 이 공간에 나 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공간에 홀로 남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는 이미 메아리만 울릴 뿐이다.
차라리 마음을 담지 않아 갑갑한 공간이라면 부수어서라도 나가서 새로운 길을 찾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열의를 다하고 진심을 다한 만큼 벽에 기댈 수 없는 순백의 공간에서는 희미한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내가 너무 외로워 보였던 것인지, 이때만 기다린 것인지 공허가 찾아온다. 그림자조차 떠난 이 하얀 공간에 조용히 곁에서 한동안 머무른다. 사실 공허가 나를 헤치거나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저 조용히 찾아왔다가 조용히 떠난다. 외로운 내가 외롭다는 생각조차 못 하게 기댈 곳을 만들어 준다.
공허를 부정하려고 시작했지만, 글을 쓰다 보니 공허는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러 찾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거대한 공간이 스스로를 외롭게 하려고 만든 공간이 아니라, 이 거대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들여온 너의 노력과 나의 시간을 돌아볼 기회를 주기 위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공간을 만들 여유를, 온 마음을 다해 달려온 스스로에게 한숨 돌릴 잠깐의 틈을 만들어 주는 존재는 아닐까.
번아웃(Burn-Out)과 함께 찾아오는 이 공허는 사실 재만 남고 타오른 내 모습이 아닌, 더 이상 담아낼 게 없는 이 공간을 태우고(Burn) 다른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라는(Out)의 의미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