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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윤규 Jun 26. 2023

이름에 세상을 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참 감사한 인연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가 건넨 그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또 아무렇지 않게 그 오랜 시간 동안 이어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기억 속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주제로 가는 구체적인 여정은 떠오르지 않지만 적어도 그 내용 자체는 선명히 남아있다.


다들 익히 알고있 듯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은 다양한 상징들로 점철된 내용이 많다. [벼랑 위의 포뇨]의 사후세계에 관한 괴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매춘 시건 이야기 등 세계관에 대한 거시적인 상징성이나 해석의 이야기들도 있지만 이번엔 조금은 세부적인 요소들을 바라보려고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관한 해석들을 보면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지며 생겨난 탐요스러운 부모에 의해 매춘 시설에서 일하게 되어 가정을 책임지게 된 한 아이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저 어린 아이인 치히로는 이름을 잃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주변 인물에게 ’치히로‘라는 이름을 절대 잊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이름을 잊는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서의 자아를 잃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 이름이라는 개념은 사회구조적 문제에 잇따른 한 개인이 가진 자아의 실현과 상실의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사회적 상징성과는 또 다른 개인적 경험의 의견을 가미하고자 한다.


왜 하쿠는 처음부터 치히로에게 이름을 잊지 말라고 했을까? 이름이 어떤 의미이기에 이름을 잊으면, 그와 함께한 기억 모두를 잊는다 이야기한 것일까?


영화 초반부와 극 후반부 ’치히로‘라는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를 두려워하고 작은 변화, 작은 어색함에도 공포감을 느끼는, 아직 부모에 의존해 살아가는 수동적인 아이의 전형적 자아를 가진다.



반대로 ’센‘이라는 이름을 얻고 나서의 삶을 보면 낯선 세상에서 낯선 타인들과 점진적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그에 따라 정당한 댓가를 받는 사회가 요구하는 능동적 구성원의 자아를 가진다.



그렇게 하나의 몸을 갖고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서로 다른 자아를 지닌 채로, 서로 다른 기억들을 새겨낸다. 그리고 그 서로 다른 이름으로 인해 주변인들은 그를 서로 다른 세상의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아직 부모의 품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아이의 모습으로, 누군가에게는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며 스스로의 본질을 탐구하는 진취적 인물로.


나도 굉장히 많은 이름으로 삶을 살아왔다. 법적 이름은 함윤규이지만, 어릴 적 원숭이 흉내를 내는 장난을 좋아했던 아이는 ’함킹콩‘으로, 윤규라는 발음이 어려웠던 할머니에게는 ’윤기‘로,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은 감사한 인연들에게 ’함짱‘, ’대장님‘으로 불리고 있다. 내가 이 순간에 보여주는 언어, 행동, 기억, 사소한 습관들이 모여 하나의 분위기와 아우라를 이루고 그를 통해 새로운 이름을 창조한다.


나도 언젠가 현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공간으로 넘어설 것이다. 그곳에서는 또 사뭇 다른 모습으로 주변이들에게 온전히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새로운 별명이 생길 수도 있고, 조직 속 직급이 내 이름이 될 수도 있고, 언젠가 내 아이의 세상에서 ’아빠‘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순간 나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단어들에 내 세상이 담기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여기저기 치여 살면서 삶의 스펙트럼 속 과거 어느 부분에서 불렸던 이름을 잊는다. 그와 함께 이름에 담긴 세상 또한 잃어버린다. 그러나 좋은 기회로 과거의 한 부분을 함께한 사람들과 시간을 갖게 되고 그 당시 갖고 살았던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의식 저편에 묻혔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찰나의 사건과 그에 따랐던 감정들, 머릿 속을 떠돌아다니던 뱉지 못한 말들까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다.


그렇게 이름은 그 세상을 담는다. 그리고 그 세상을 질문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이름이 중요시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아니었을까. 하나의 삶에서 수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 과거 머물렀던 세계를 떠난 보낸다. 바쁘다는 이유로, 시간이 너무 흘렀다는 핑계로 우리를 구성했던 시간을 외면한다.


치히로라는 순수한 동심을, 큰 이유가 없어도 모든 것이 마냥 재밌고, 주변 모든 것이 새로웠던 세계를 잃고, 책임져야할 일들이 늘어나며 서투르지만 사회에 조금씩 익숙해지며 조금은 어른스러워지는 과정이 담긴 세상 조차 언젠가 잃게 된다는 현실을 마음 아파한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이렇게 격변적이고, 입체적인 이 수많은 영화같은 장면들이 조금의 언질도 없이 사라진다는 게 비통했던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도 내 친구들에게 나만 부르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곤 한다. 조금은 장난스럽지만 내가 가장 잘 애정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언젠가 분명히 다른 세상에 존재할 나지만, 언제가 되어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지금의 세상을 떠올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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