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슬며시 찾아왔다. 가을은 앉아서 향기를 맡는 것이고 푸른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다. 가을바람은 귀로 듣고 눈으로 담고 음미하는 것이고 품는 것이다. 가을엔 햇살을 따라 쉬엄쉬엄 걷는 것이다.
여름과 겨울 사이 어느 날, 양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서울·양양 고속도로 개통으로 약 두 시간이면 양양에 갈 수 있다. 양양 해변에는 짠내가 바람에 실려 오고 신선한 바람과 해송의 그늘이 있어 좋다.
서울·양양 고속도로 개통 전에는 국도를 달려 구불구불한 한계령 옛길을 가야만 했다. 정상휴게소에 도착하여 커피 한잔 마시고 안개를 뚫고 아슬아슬한 길을 내려가 양양에 갈 수 있었다. 양양 가는 길은 다섯 시간 이상 운전으로 불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주말 아침 가평휴게소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나는 고속도로에서 110km 속도를 유지하며 안전 운행을 하며 여행을 즐긴다. 가족을 위해 안전을 추구하는 작은 배려는 나의 몫이다. 식후 나른함에 창을 열어 바람을 들인다.
인제 내린천휴게소를 지나면 우리나라 최장 약 11km 되는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 인제·양양의 긴 터널은 과속과 졸음운전을 방지하기 위해 S자 모양으로 네 번 휘어지게 설계한 배려가 숨어 있다. 터널을 통과하다 보면 LED 조명의 하늘과 무지개 구간이 지루함을 달래고 사이렌 소리가 긴장감을 준다. 터널을 빠져나와 국도에 접어들면 낙산 해수욕장의 이정표가 우리를 기다린다.
낙산해변에는 먼저 도착한 여행객이 망중한을 즐기고 방파제 끝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빨강 등대가 가을의 햇볕을 쬐고 있다. 뱃길을 안내하는 등대는 삶을 등지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빨강 옷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낭군을 기다리는 형상에서 절개가 보인다. 심술이 심한 구름은 등대의 사실을 말하지 않으며 비타협적이라고 꼬집는다. 그러나 등대는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꼬집어 말하지 않는다. 구름과 바람은 조급하며 꾀를 자주 내고 성질이 까탈스러워 등대를 시샘하고 힘들게 한다. 바람과 구름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등대가 믿음직스럽다.
모래에는 가을을 머금은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해송 나무 아래는 솔방울이 할 일을 마치고 쉬고 있다. 우리는 바다와 마주하고 해송의 그늘에 자리 잡았다. 따가운 가을 햇살에 삼삼오오 해변을 걷는 가족과 바닷가 모래에 앉아 독백을 즐기는 여자가 쓸쓸해 보인다. 파도를 벗 삼아 물놀이에 빠진 단체 여행객은 친구 하나를 물에 던지고 도망치기를 반복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바다를 가까이 보기 위해 아들과 함께 맨발로 모래를 걸었다. 가을 햇살을 담은 수북한 모래의 촉감이 부드럽다. 바다의 맑은 물빛에 눈이 상쾌해진다. 바다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고 절로 웃음 짓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밀려드는 파도가 발목을 적시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아들은 옆에서 놀던 또래 남자아이에게 함께 놀자며 말을 건넨다. 먼저 말을 걸어 친해지려는 아들이 대견하다. 둘은 함께 여행 온 친구처럼 파도에 몸을 적시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남자아이의 부모는 더 놀고 싶은 아들을 데리고 다음 목적지를 간다며 인사를 건넨다.
물에 젖은 아들을 데리고 발 닦는 수도에서 모래를 털어내고 씻겼다. 차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들이 말끔해 보인다. 해변에는 해송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는 여행객의 모습이 여유롭다.
돗자리에 누워 하늘을 보며 슬며시 잠들려는 찰나에 이상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강아지가 돗자리 옆에 용변을 보고 주인에게 달려간다. 나도 모르게 강아지에게 “야!”하고 소리쳤다. 강아지 주인은 말없이 쳐다만 본다. 미안하다며 용변을 치울 생각은 더욱더 없어 보인다.
강아지 주인의 배려 없는 행동에 즐거웠던 여행이 불쾌해졌다. 강아지 주인은 “강아지 용변 냄새가 나면 얼마나 나요.” 하며 적반하장이다. 피해 끼치고 사과하지 않는 주인의 뻔뻔함에 욕을 해주고 싶었다. 작은 배려가 여행을 따뜻하게 한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예의를 지켜 주면 좋겠다.
반려견 인구는 천만이 넘는다. 노령화와 혼족의 증가로 반려견 인구는 더 증가하고 사건 사고도 증가한다. 반려견 관련 조항이 있지만, 처벌은 미미하다. 목줄과 입마개를 하지 않아도 길가 용변을 치우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 솜방망이 처벌에 갈등과 분쟁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반려견과 인생을 함께하려면 남을 배려하는 성숙함도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에 배려가 중심이 될 때,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된다.
뜨거운 태양을 그늘에서 피할 수 있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무한한 사랑과 배려에 감사한다. 모두의 배려가 제 몫을 할 때 세상은 살아 볼 만한 아름다움의 세상이 되리라.
가을 낮 햇살보다도 더 환하게 웃을 날이 얼마나 될까! 참 괜찮은 가을에는 많은 걸 하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을 가슴에 담고도 넘쳐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은 마음이다. 가을밤은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귀가 예민해진다. 뾰족하던 감정도 무뎌지고 순해져 햇솜 이불처럼 따뜻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