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저녁, 몹시 지쳐 보이는 노파 한 분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폐 상자가 쌓인 손수레를 끌고 지나간다. 등이 굽은 채 끌고 가는 노파의 손수레가 느리게 구른다. 이따금 손수레 뒤에선 자동차 경적이 울리기도 했지만, 여든이 넘어 보이는 노파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아니, 노파의 삶에서 자동차 경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도로를 따라 손수레를 끌고 가는 노파의 모습이 어슴푸레하다.
며칠 전, 퇴근길에서 보았던 노파가 나의 일터 사무실 앞을 지나친다. 빈 손수레를 끌고 가는 노파의 표정에선 심신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노파에게 가족은 있는 것일까. 폐 상자를 주워야 하는 노파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폐 상자를 주어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겨울이 더 춥게 느껴진다.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온종일 폐 상자를 주워 고물상에 주고 돈을 받아 살아야 하는 모습에 동정심이 들었다. 나는 노파를 보며 나의 말년이 궁금해졌다.
어느 날 노파가 사무실 통유리에 기대앉아 점퍼 주머니에서 천 원 몇 장을 꺼낸다. 노파는 천 원 몇 장을 세고 또 세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노파는 헛헛했던지 붕어빵 가게 앞을 망설이다 천 원을 내밀고 붕어빵 봉지를 받아 든다. 매일 점심을 붕어빵으로 먹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노파는 다시 유리창에 기대앉아 천 원 지폐 몇 장을 꺼내 확인하며 미소를 짓더니 천 원을 한 번 접어 검정 점퍼 주머니 깊숙이 넣는다. 천 원 몇 장을 벌기 위해 폐상자를 손수레에 담아 끌고 다니는 고된 생활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말간 햇살을 받으며 쉬고 있는 노파는 노곤했던지 유리창에 기대 수잠에 빠진 듯하다. 나는 노파가 걱정되어 의자를 주며 앉아 쉬라고 했다. 그 이후로 노파는 내준 의자에 가끔 앉아 쉬었다 가곤 했다.
눈이 내릴 것만 같은 날,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리창에 기대고 앉아있는 노파를 사무실에 들여 몸을 녹이라고 했다. 노파에게 커피를 타서 한 잔 드렸다.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노파는 천 원 몇 장을 꺼내 또 세어본다.
내가 “할머니 돈 많이 모으셨네요.” 하는 소리에 그는 경계심을 나타내며 의자에서 일어서려고 한다.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돈 빼앗지 않을게요.” 하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다시 앉는다.
나는 만 원 한 장을 노파에게 건네며 따뜻한 밥 한 끼 사드시라고 말했다. 노파는 만 원을 보고 망설이다 돈을 받아 들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만 원을 만지고 또 만져보며 천 원 몇 장과 합쳐 주머니에 넣는다. 노파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만 원을 꺼내 보며 ‘어젯밤에 내가 좋은 꿈을 꾸었나?’ 하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내가 건넨 만 원을 보이며 “온종일 손수레를 끌어도 벌 수 없는 돈입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손수레를 힘들게 끌어모은 돈은 자장면 한 그릇 먹는 것도 아까워요.” 하며 다시 말을 잇는다. “온종일 손수레를 끌어도 누구도 백 원 하나 주지 않아요. 만 원을 벌려면 이틀을 꼬박 손수레를 끌어야 얻을 수 있는 돈입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돈을 보면 빼앗으려고 하는 나쁜 사람은 있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없어요.” 하며 세상이 각박하다고 말했다.
나는 “안 먹고 모은 돈 어디에 쓰실 건데요.” 하고 노파에게 물었다. 그는 환갑 지난 아들이 병석에 누워 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노파는 만 원을 꺼내 소중한 보물 다루듯이 어루만지며 아들의 약을 사야 한다고 말했다.
노파가 다시 점퍼 주머니에 돈을 넣으며 따뜻하게 쉴 수 있어 고맙다며 사무실을 나갔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만 원을 보며 위조지폐 확인하듯 반신반의한 표정이다. 그 이후로 한동안 노파를 볼 수 없었고 노파의 소식이 궁금했다.
이듬해 봄이 완연한 날, 노파가 사무실 앞을 지나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 안녕하세요! 아드님 병세는 어떠신가요?”하고 물었다. 노파는 눈물을 글썽이다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며“만 원은 저승 갈 때 노잣돈으로 쓰리다.”라고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노파의 뒷모습이 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