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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준 Sep 25. 2021

나의 스승은 시간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느리게 최선을 다하는 미물에게 배우라고 달팽이를

2층 거실 유리창에 달팽이가 나타났다. 1층 화단 야생화에서 부화하여 2층 거실 유리창까지 올라 온 것 같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며칠 동안 최선을 다해 2층까지 오르다니 신기하고 놀랍다. 10mm 정도 되는 작은 몸뚱이가 바퀴처럼 생긴 다리로 2층 거실 유리창까지 오르다니 믿기지 않는다. 달팽이 걸음으로 4m까지 오르려면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사력을 다한 달팽이가 거실 창을 당당히 걷고 있다. 


움직이고 있는 건지, 멈추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움직임으로 유리창을 오르고 또 오른다. 달팽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더듬이를 세우고 두리번거린다.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길을 나선 달팽이는 세상 풍경에 환한 미소를 짓는다. 

  

달팽이는 머리가 뚜렷하고 발은 넓고 편평하며 몸 전체의 신축성이 매우 뛰어나다. 머리에는 두 쌍의 더듬이가 있고 큰 더듬이의 끝에는 아주 작은 눈이 있다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동하는데 필요한 그 많은 양의 점액질이 어디서 생기는지도 궁금하다. 

  

달팽이는 더듬이를 세우고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제집을 지고 기나긴 여정 중이다. 천적의 위험을 각오하고 출발한 달팽이의 목적지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 4m 높은 곳에 도착한 녀석은 아마 길을 잘못 들어선 모양이다. 천적으로부터 노출된 달팽이는 잘못 선택한 길이라는 걸 알기나 할까. 삶이란 사람이나 미물이나 본인의 뜻과 다르게 길을 잘못 들어 다른 곳으로 향하기도 한다. 경로 이탈한 달팽이는 시행착오 끝에 길을 찾아 숲속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달팽이는 숨어 있던 곳에서 밤이나 비 오는 낮에 활동한다. 쉬엄쉬엄 오르던 녀석은 물기 없는 유리창을 자근자근 밀다가 멈추고 숨을 몰아쉰다. 풀과 이슬을 먹고 성장했을 달팽이가 갈증을 느끼고 물을 찾는 듯하다. 종족 번식의 본능으로 탄생한 귀한 몸도 험난한 길을 피해 갈 수는 없나 보다. 오르기 벅찬 위험한 절벽을 오르며 깨달음의 경지를 이룬 양 미소를 머금는다. 마치 암벽 등반가처럼 벽에 붙어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가끔 볼 수 있는 달팽이 걸음은 느리지만, 최선을 다하는 걸음은 기적이 된다. 

  

멧새가 능소화나무에 앉아 달팽이를 노리고 있다. 달팽이가 붙어있는 유리창의 허허벌판은 몸을 숨길 곳도 없다. 너무 느려 빨리 피신할 수도 없는 달팽이는 천적을 직감한 듯 경계태세를 갖춘다. 달팽이의 위기 모면은 몸을 집에 넣어 움직임을 멈추는 것뿐이다. 달팽이의 운명은 선택의 기회조차 없이 천적의 선처를 바랄 뿐이다. 달팽이가 제집으로 몸을 숨기고 움직임을 멈추자 멧새는 다른 먹이를 찾아 날아간다. 세월을 등에 업고 이소를 시작한 달팽이는 천적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한다. 

  

달팽이가 안쓰러워 분무기로 유리창에 물을 뿌려주자 더듬이를 세우고 몸을 크게 움직인다. 물방울로 몸을 적시며 휴식을 취한 달팽이가 다시 어금니를 악물고 출발한다. 쉴 새 없이 오르고 내리며 살 속을 파고드는 바람의 채찍을 맞으며 귀 막고 눈 감고 달리는데 전력을 다한다. 부지런히 성장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겨울잠 잘 곳을 찾아야 한다. 

  

녀석은 어떤 길을 만나도 피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길을 잘못 들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풀과 벽에 붙어서 크게 한 발 내딛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내리막을 내려갈 때도 오를 때와 변함없이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거칠고 딱딱한 벽돌을 오르고 돌출된 창문틀을 넘고 걷기에 불편한 방충망을 오르다 되돌아서기도 한다. 힘들어도 불평등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조물주가 준 집을 내려놓지 않고 하늘의 해도 모래알처럼 작게 보며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제집을 짊어지고 평생 살아야 하는 삶이지만 주어진 숙명에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미물이나 사람이나 삶을 살아가는 고행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느려도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부족해도 훔치거나 탐내지 않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고행으로 지쳐 숨 고를 시간조차 없어 곤두박질칠 것 같아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부럽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조금씩 몸에 힘이 붙고 생장하며 생각이 커진다.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여유가 빨리빨리 급하게 사는 우리네 삶보다 더 귀하고 값져 보인다. 우리가 평생 겪을 수 없는 일을 달팽이는 보란 듯 몸소 실천하고 있다. 느려서 답답하다고 비웃을 자 누구인가. 느리게 산다고, 하찮은 미물이라고 업신여기지 말아야겠다. 더위에 지쳐 발바닥이 상하고 패이고 갈라져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조물주가 가장 낮은 곳에서 느리게 최선을 다하는 미물에게 배우라고 달팽이를 탄생시켰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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