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파리 여행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나는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중학교 미술 선생이었던 고모 집에 가면 명화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후기 인상파 작품을 가장 좋아했고 그들이 살았다는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은 가장 동경하는 곳이었다. 대학시절 친구가 보내준 파리의 에펠탑 사진엽서는 언제나 내 침대 머리에 붙어있었다. 그렇게 그리던 파리로 여행을 떠난 것은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2004년 가을, 10개월간 영국에서의 어학연수가 끝날 무렵이었다. 생활비가 거의 다 떨어져서 여행에 쓸 수 있는 돈은 매우 적었다. 밤에 떠나는 저가 항공을 이용했고 파리 외곽의 한인 민박 6인실에 투숙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 커피믹스를 보온병에 담고 민박집에서 제공한 바게트 샌드위치는 점심으로 챙겼다. 파리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목돈이 들어가는 박물관 패스를 구입하고 나니 수중에는 교통비와 비상금으로 쓸 삼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4박 5일의 일정에서 3일은 루브르를 시작으로 오르세, 퐁피두센터, 로댕 갤러리, 피카소 미술관을 다리가 아파 더는 걸을 수 없을 때까지 수많은 미술품을 구경했다. 책으로만 보았던 고흐의 그림 앞에서는 벅찬 감동에 눈물을 흘렸다.
4일째, 가장 기대하고 아껴두었던 장소인 몽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전철역에서 내려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보며 세잔, 고흐, 피카소, 르누아르, 마네, 드가, 로트렉을 떠올렸다. 그들의 작품을 직접 보고난 뒤라 그런지 어디서든 그들을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지도를 보며 그들이 살았다는 아틀리에와 물랭 루주의 풍차를 보았고 고흐와 피카소가 자주 들렀다는 카페도 찾아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큼직한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시는 여행자들을 나는 돈이 없어 멀찌감치 떨어져 부러운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잠시 동안 비상금을 쓰느냐 마느냐 갈등에 시달렸지만, 기필코 이곳에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몽마르트 언덕에는 작고 수수한 주택과 건물들로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그 옛날 가난한 예술가들이 집값이 싸서 많이들 살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택가 사이 언덕에 작은 밭도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작은 알갱이의 청포도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맞은편 작은 가게에는 그 포도로 만든 와인을 팔고 있었다. 골목을 오르다 검은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작고 네모난 간판을 보았다. 로트렉 미술관으로 이곳은 박물관 패스를 이용할 수 없었다. 커피숍에선 참을 수 있었지만, 그림 앞에선 비상금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입장권은 저렴했고 작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전시관은 색다른 감동을 주었다. 그곳을 나와 다시 골목을 걷다가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있는 작은 벤치를 발견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 드디어 내가 이곳에 왔구나.’
여태껏 나의 꿈 목록에서 이루어진 게 있었던가? 화가가 되는 것은 일찍이 부모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했고, 대학에서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상경해서 일류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자 애를 써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서른 살에 제주도로 귀향해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교수가 되어보고자 노력했지만,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병환으로 경력이 끊기며 이 또한 포기해야만 했다. 그사이 결혼도 실패하고 그야말로 인생에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떠났던 영국에서 지난시간 상처받고 지쳐있던 마음이 조금은 회복되긴 했어도 미래는 여전히 두려웠다. 그러기에 작은 소망이더라도 성취한 이 순간의 감정은 정말 소중했다. 어둡고 답답했던 내 미래에 밝은 빛줄기 하나가 비춰주자 심장은 강하게 뛰었다. 숨을 크게 내쉰 뒤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눈물 나게 맛있었다.
그날 밤은 환희에 들떠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쉬움 때문일까 내내 부러움으로 바라봤던 몽마르트의 카페가 잊히지 않았다. 수중에 남은 돈을 다 합치니 커피값은 되었다. 다음날 비행기 타기 전 마지막 여행지로 다시 몽마르트를 찾았다.
‘이럴 수가….’ 카페의 문은 닫혀있었고 휴일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문고리에 걸려있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꼭 그곳이어야 하기에 다른 카페에서 아무리 손짓을 해도 갈 수는 없었다. 상심한 여행자는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갔다.
7년이 흐른 뒤 몽마르트 언덕에서 커피를 마시지 못했던 한을 풀 기회가 찾아왔다. 파리에 사는 친구가 초대한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며 여비를 마련해 놓았기에 이번에는 지갑에 두둑이 돈을 챙겨서 떠났다. 이 무슨 운명인지 어이없게도 여행 첫날 집시들에게 지갑을 통째로 소매치기당했다. 순식간에 무일푼 여행자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경찰서에 가서 신고했지만 기대하지 말라는 대답을 들었다. 친구가 경비를 빌려주었어도 그 돈으로 다니는 여행이 편할 리는 없었다.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자 나는 여행 일정도 줄이고 그 좋아하는 미술관이나 몽마르트는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혼자 공원이나 산책하고 오겠다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친구를 두고 외출했다. 막상 거리로 나오니 기운이 조금은 났다. 기분도 그렇고 해서 한적할 것 같은 몽파르나스 묘지로 갔다.
어릴 적 고모에게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사랑에 대해 막연히 흥미를 갖고 있다가, 이번 여행 전에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을 읽었던 터였다. 많은 예술인이 잠들어있는 공원에서 가장 먼저 매력적인 지식인 부부의 묘지를 찾았다. 그들의 명성만큼 대리석 묘비에는 여인들의 립스틱 자국이 잔뜩 묻어있었다. 묘비에 키스한 것이었다. 바닥에는 여행자들이 남기고 간 메모지가 작은 돌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여성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왔다. 혼자 온 그녀도 다른 이들처럼 묘비에 키스했고 나는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주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싱긋 웃어주는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나의 굳어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 보니 며칠간 제대로 웃어본 기억이 없었다. 죽은 이들 앞에서 모르는 사람을 통해 위안을 받게 될 줄이야.
기분이 나아지자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묘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 때는 미처 못 봤던 눈길을 끄는 카페가 있었다. 파리의 지성인들이 모여들어 토론을 벌였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많은 글을 썼다는 문학 살롱‘레 두 마고(Les Deux Magots)’였다. 이번에는 바지주머니에 비상금으로 챙긴 얼마간의 돈이 있었기에 나는 그곳 야외 테이블에 당당히 앉았다. 정복 차림의 인상 좋은 웨이터에게 카푸치노와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했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작은 테이블 위에 커피와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려좋았다. 하얀 커피 잔을 드는데 손이 가볍게 떨렸다.
‘아…,’파리에서 소매치기당한 것을 한순간에 잊게 하고 7년 전 몽마르트 카페에서 마시지 못했던 한을 풀어주는 맛이었다. 파리에 대한 나의 사랑이 부활했다.
차 한 잔 마실 여유의 돈만 있어도 진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곳. 어쩌면 이곳은 가난한 여행자에게 안성맞춤인 도시가 아니었을까? 파리 여행의 기회가 또다시 찾아올지는 모르겠다. 만약 가게 된다면 반드시 복대지갑을 차고 가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