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시 영화를 예매했다.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의 날이고, 가정의 날이고, 무엇보다 국과장님이 출장으로 사무실을 비운 무두절이다. 출근길이 모처럼 가벼웠다. 당장 급한 일도 없는터, 미뤄왔던 일 슬렁슬렁하다가 땡퇴근해야지 싶었다. 룰루랄라.
하지만 어림도 없다. 출장지에서의 일이 빨리 끝났다며, 국과장님 모시고 사무실로 복귀한다는 사무관님의 카톡에 맥이 저절로 빠졌다. 땡퇴근은 물 건너갔다.
"땡퇴근"이라고 하니 어감상 뭔가 얄밉기도 하고 뺀질이들의 전유물 같지만, 엄연히 정시퇴근인데 왜 이렇게 눈치가 보이는지 모르겠다.
마침 요새 한 일간지에서 한국의 "가짜노동"에 대한 기획기사 - "가짜노동"이라는 책을 기반으로 한 기사인데, 책의 저자에 따르면 가짜노동이란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이자 노동과 유사하되 무의미한 업무를 의미한다 - 를 연재하고 있다. 이런 "눈치성 야근"이야말로 내 시간을 좀먹는 분명한 "가짜노동"이다. 기사에서는 급격한 경제성장 및 산업화와 유교 문화의 환상적인 콜라보로 인해 가짜노동이 한국에서 당연하게 자리 잡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 덧붙여 "나만 당할 수 없지"라는 고약한 심보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언젠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첫 출근을 한 친구가 울면서 내게 전화한 적이 있었다. 주요 내용은 눈치가 보여서 무려 6시 30분에 퇴근했다는 거였다. 표면상으로는 고생했다며, 무슨 그런 일이 있냐며 같이 분노해 줬지만, 속으로는 그 정도는 칼퇴근인데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며 날 선 비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첫 출근날 11시에 퇴근했었고, 6시대에 퇴근이 가능하면 그건 내 기준 칼퇴근인, 그런 고달픈 시기를 겪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을 한 나도 가짜노동을 당연시하는 참 고루한 꼰대다. 그리고 나 역시도 퇴근에 대해 그렇게 생각을 하니, 오늘 정시퇴근이 불가한 처지가 되었다. 꼰대는 꼰대의 눈치를 본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MZ"라는 단어의 유행과 함께 노동시간이라던지 불필요 또는 비효율적인 노동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생기고 있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인식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곤대 VS MZ". 외계인 같은 MZ의 행태들을 희화하하는 밈들이 유행하고 있지만, 이런 밈들이 쌓여 문화가 되곤 하니, - 물론 남에게 피해가 되는 행태들은 분명히 지양해야 한다 - 말단 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참 긍정적인 시대의 변화다.
비록 나는 오늘 영화시간과 버스시간을 계산하면서 6시 넘어서까지 애먼 폴더 정리를 하며 애를 태우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줄이고 정시퇴근이 당연한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음... 나부터 눈치 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가져야겠지만.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