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by 고사리나물

놀이터는 비어 있었다. 아니, 비어 있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었다. 아이들이 학원과 학원 사이 잠깐 비집고 나와 숨 고르듯 뛰놀다 사라지는 그 틈을 빼고 나면 놀이터는 노인정을 왔다 갔다 하는 노인들의 적막한 움직임만 가끔 있을 뿐 썰렁했다. 은영은 그 풍경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놀이터는 원래 아이들이 있어야 할 곳이지만 엄마들은 놀이터를 지나칠 뿐, 정작 아이들을 오래 두고 가는 법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수학학원 가야 해.”

“다음에 또 놀자. 지금 영어 가야 하거든.”


엄마들은 어김없이 그런 말투였다.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 교양 있는 듯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 아이들은 아쉬운 듯 손을 끌려가면서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시간대만 되면 으레 윤우와 더 어린 아기들이나 형들만 남았다. 그나마도 잠시만 머물다 갈 뿐 함께 놀 또래가 있는 날은 드물었다.

모래를 움켜쥐었다 흘리고, 미끄럼틀을 오르내리기를 몇 번 하던 윤우는 이내 지루하다는 듯 내려왔다. 허공을 보며 발끝으로 흙을 툭툭 차던 아이가 은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엄마, 나 이제 심심해.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윤우는 킹스니즈 영어유치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엄마, 여기 도원이 다니는 데 맞지? "

아이의 눈은 반짝였고, 목소리는 확신 찬 듯했다

“그리고 수현이는 저 옆골목 Egg잖아. 맞지?

난 다 알아. 엄마가 말해줬잖아.”


은영은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은 건성으로 흘려 말한 게 다였다. 아이가 하도 귀찮게 물어보길래 딱 한 번, 단숨에 읊어준 게 다였다.

그래 누구는 어디로 갔고, 누군 어느 유치원에 합격했다더라. 제멋대로 줄줄이 쏟아내듯 내뱉은 걸 아이는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 도원이랑 놀고 싶어. 수현이도.

놀이터에서 같이 모래놀이 하고 싶어.”

"..."

“엄마, 수현이랑 도원이 언제 다시 만나? 같이 놀고 싶은데.”

아이는 다시 물었다. 은영은 대답해야 했지만 적당한 답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응… 다음에 놀이터에서 다시 마주치면 엄마들끼리 연락을 해야 너희가 놀 수 있는 거야.”

기약 없는 약속을 아이에게 기대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은영의 마음속 웅크리고 있던 불안이 눈을 빛내며 살짝 고개를 들려고 하고 있었다.


다섯 살이 되면서 윤우의 반은 눈에 띄게 자리가 비었다. 입학시험조차 필요 없거나 입학 테스트가 있더라도 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기, 선생님과 상호작용 잘하기, 기저귀를 땠는지 여부 정도만을 보는 막차 나이가 다섯 살이었다.

그 때문인지 다섯 살반에 올라가며 원래 아침마다 보던 얼굴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흔했다.

그리고 윤우는 그 빈자리를 누구보다 잘 기억했다.

“엄마, 도원이, 수현이 다 유치원 갔어요? 그래서 같이 못 노는 거예요?


정작 윤우는 영어도 학원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더 뛰어놀고 싶을 뿐이었다. 그 순수한 바람이 은영의 가슴을 찔렀다.


집에 곧장 들어가기엔 마음이 쓰여 은영은 괜스레 윤우가 좋아하는 구슬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평소엔 잘 사주지도 않던 걸 오늘따라 먼저 건네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가 알록달록한 알갱이를 입안에서 굴리며 즐거워하는 걸 보며 잠시라도. 안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은영은 윤우와 집에 가는 길 골목길에 있는 구슬아이스크림가게 '버블버블'에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여자가 허겁지겁 들어와 냉녹차를 시켰다.

메뉴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여자는 그걸 키오스크가 아닌 카운터에 가 물어서 주문하고는 나오자마자 들이키듯 단숨에 마셨다. 바깥 날씨가 무더운 걸 감안하더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지고 머리가 띵했다. 그러더니 여자는 이내 벌떡 일어나 가게 건너편 논술학원 앞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아이가 나왔다.

방금 전 가게 안에서의 성급하고 불안한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여자는 교양 있고 온화한 얼굴로 아이를 맞았다. 선생님과 나누는 인사에도 여유가 묻어났다.

은영은 창문 너머 여자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윤우가 질문을 했다.

"다음은 어떤 맛을 먹어볼까~?"

아이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다음 맛을 고민하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때면 까맣고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 오므리는 동그란 입술. 뽀얗고 조그만 얼굴. 골똘한 표정.

은영은 순간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다섯 살인 윤우의 시간에 함께 머물며 아무 걱정 없는 아이의 얼굴을 오래도록 원 없이 보고 싶었다.


눈물이 나기 전에 그대로 멈춰라.

지금 이 순간부터 시간아 멈춰라.


우습게도 그 순간 은영은 남편과 연애를 하던 시절 즐겨 듣던 노래가사가 생각이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허망하지만 가슴이 한편이 아릿한 그 바람은 진심이었다.

은영은 괜스레 윤우의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놀이터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 너무 길지 않길 바라면서 은영은 윤우의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올려주었다.

이전 02화이 층집 그 아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