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 봄, 토마토

by 고사리나물

은영은 아침 9시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야 급하게 탄 커피를 손에 쥔 채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은영의 집은 다채동 학원가 골목에 있는 오래된 다세대주택의 맨 꼭대기층이다.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 아이가 곧잘 혼자 걷기 전까지는 매일같이 아이를 안고 가파른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려야 했다. 그 계단은 정말 말 그대로 아슬아슬하게 생겼었다. 은영의 집 거실 한편에 붙은 베란다에서 내다보면 길 건너편 초등학교 운동장이 훤히 내려다보였고 등하굣길 아이들의 목소리는 4층인 은영의 집까지 유난히 잘 울렸다. 하지만 은영은 그 소음을 딱히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건 은영의 일상 속 작은 먼지 같은 것이었다.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걸어간 식탁 위엔 전날 저녁 아파트 우편함에 꽂혀 있던 마트 전단지가 펼쳐져 있었다. 종이 한 귀퉁이에 ‘대저 토마토행사-1kg 2팩에 25000원’이 진한 빨간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순간 은영은 문득 깨달았다. 봄이 왔구나. 토마토가 제철이 되었단 생각이 들자 은영의 입안 가득 미세한 물기가 스며들었고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식욕이 올라왔다. 미뤄뒀던 장 보기가 오늘이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학원 간판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을 지나 은영은 천천히 마트 쪽으로 걸었다.

초등 심화 수학, 영재 수학, 사고력 수학, 역사논술, 코딩, 학습멘털관리 컨설팅까지—간판마다 과목은 더 잘게 쪼개져 있었고, 현수막마다 새로운 프로그램이 걸려 있었다. “1:1 밀착 관리” “7세부터 시작하는 메디컬 사고력”, "영재 의대반" 같은 문구가 거리에 넘쳐났다. 한두 개쯤은 들어 본 학원을 비롯한 한 번도 못 들어본 학원들로, 혹은 학원인지도 모를 학원들로 이 골목은 늘 숨 막히게 빽빽했다.

잰걸음으로 큰길을 빠져나와 사거리의 오른쪽 코너를 돌자 한쪽 귀퉁이에 지난달 새로 생긴 브런치 카페가 나왔다. 엄마들 사이에 괜찮다고 심심치 않게 소문이 돌던 터였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서 엄마들은 그곳에서 이른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커피에, 2차 커피를 마시며 오후 세시반쯤 되면 아이들을 하원하러 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은영이 그 가게 앞을 지나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푸시 알림이었다.

은우의 어린이집 친구 엄마가 sns에 새 게시물 올린 것이었다. ‘OOO어학원 5세 영어유치원 오후반 설명회 다녀왔어요!’이라는 캡션과 함께 이 동네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학원간판 사진이 떠 있었다. 핸드폰에 알림이나 메신저를 확인할 때면 늘 중얼거리며 무언가 읽는 습관을 가진 은영이었지만 이번에는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대신 가방 안으로 폰을 깊숙이 밀어 넣고, 한참 동안 꺼내보지 않았다.

마트에 도착해 곧장 과일코너로 간 은영은 사기로 마음먹은 그 토마토 두 팩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토마토는 어째서인지 채소이면서 늘 과일코너에 있었다. 토마토 두 팩은 아이가 밥을 반쯤 먹다 남기고 그것만 집어먹더라도 몇 알쯤은 은영 자신도 먹어 볼 수 있는 넉넉한 양이었다.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토마토도 함부로 못 고르는 세상이었다.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창문을 열고 선풍기만 틀어놔도 저녁이 되면 선뜩한 기운이 다리에 달라붙곤 했던 그 계절이면 한가득 사다 놓고 먹다 먹다 변할까 봐 설탕에 잘 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던 어린 시절과는 딴 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사기로 했다. 아이가 잘 먹고 자기도 한두 알쯤은 먹을 수 있을 테니까.

저녁이 되자 남편은 여느 때처럼 늦었다. 직업강사인 그는 강의가 몰리는 달이면 자정을 넘겨서야 집에 들어오는 일들이 많았고, 이제는 그런 일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은영은 익숙한 듯 더 이상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아이와 단둘이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다렸던 그 토마토 두 팩을 꺼냈다.

하나를 다 먹고 나면 다른 하나를 꺼내는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 토마토에 식욕이 돋아 두 팩을 한꺼번에 모두 씻었다.

그다음 은영은 마트 행사 때 1+1으로 산 투명한 트라이탄 통을 열어 다 씻은 토마토를 넣은 다음 식탁 위로 밀어 놓았다. 아이의 식욕을 자극하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안정감을 주기 위해 은영은 줄곧 속이 훤히 보이는 그릇류를 썼다. 이 동네에서는 아이 체력 키우는 것도 나중에 공부를 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니 준비시켜야 했다.

그렇지만 은영은 차마 저울에 그램을 재서 먹이는 것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딱 그 정도의 심정으로 적당한 노력만 기울이는 중이었다. 네 살 때 예약을 잡아두어야 초등학교입학 때쯤 진료를 받아볼 수 있다는 유명 성장클리닉도 아직 예약하지 않았다. 그때 도연이 엄마가 예약한다 그랬을 때 같이 잡을껄그랬나?

잠깐 사이에 스치는 생각들을 밀어내고 트라이탄통째로 식탁에 토마토를 내주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손으로 집어 한 알을 먹고 입가에 토마토즙을 묻힌 채 맛있다고 했다. 은영은 아이의 말에 귀엽다는 듯 가만히 웃고는 자신도 포크로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혀끝에 닿았고 그 찰나에 어느새 봄이 와 있었다.

과일 하나에도 계절이 깃들고 그 변화를 알아챌 틈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은영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그것만으로도 뭔가 잘 견뎌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빠듯한 살림이지만 이 만큼의 틈은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처럼 마음속에 흘러들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아이를 재우고 나자 집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은영은 그 고요 속에 몸을 맡기듯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며칠 동안 닫지 않고 열어둔 여러 창들을 옆으로 휙휙 넘기며 살펴보았다. 그중엔 낮에 봤던 어린이집 친구 엄마의 게시물이 여전히 상단에 떠있는 SNS창도 있었다.

은영이 가만히 그 창을 클릭하여 확대시켰다.

은영은 이번에도 피드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화면 속 세상이 자신의 일상에 스며드는 걸 막으려는 듯 오히려 그쪽에서 이쪽을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봐 숨죽여 화면 밖에서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이내 피로감이 몰려온 은영은 핸드폰 화면 옆 버튼을 꾹 눌러 핸드폰 전체 화면을 꺼버렸다. 입안에는 아직 토마토의 맛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