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층집 그 아이- 1

by 고사리나물

유모차는 더 필요 없는 물건이었지만 딱히 버릴 데도 마땅치 않아 복도 끝에 세워뒀다.

치워야지 했지만, 막상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 늘 생각만으로 그치곤 했다.

은영의 손엔 방금 사 온 우유 두 통이 들려 있었고, 가방 안엔 유통기한이 며칠 남지 않은 할인 딱지가 여러 번 덧대져 몇 번 간의 파격세일을 거친 딸기잼이 들어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은영은 허리에 걸리는 묵직한 통증이 머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2층을 지날 때, 문틈으로 영어 동요가 흘러나왔다.

“롤 더 스노우 볼, 롤 더 스노우 볼—”

문득 은영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 노래는 간혹 은영의 집까지도 들린 적이 있는 노래였다.


2층은 은영네보다 절반쯤 되는 크기였다. 이 빌라에서 은영네는 4층 전체를 쓰고 있었고

그 아래층들은 은영의 집 평수를 둘, 셋으로 쪼갠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2층은 두 집이니 은영의 집 반쯤인 셈이다.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 대문만 각각 달아놓은 두 집 중에 오른쪽 집이 2층 202호였다.

말간 얼굴, 종이처럼 얇은 팔, 늘 엄마 뒤에 꼭 붙어 걷는 여자아이.

은영이 인사를 해도 좀처럼 대답하지 않는 그 아이는 엄마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엄마와 아이, 둘이 있을 때면 마치 같은 반죽으로 빚어놓은 밀가루 인형 세트 같았다.

올해 여름의 더위는 유난히 지독했고 축축했다. 언젠가부터 열대과일을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된 지는 기사로 봐서 꽤 오래된 것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그날도 오후가 되자 계단난간마저 달궈졌고 건물 벽은 그저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열기가 팔에 뻗칠 만큼 뜨거웠다.

그 무더위 속을 헤치고 나가 아침 등원 길에 윤우가 먹고 싶다던 냉동 새우튀김을 사 오던 길에 2층을 마주친 것이다. 아이를 태워 온 유모차를 접어 정리하고 있는 이 층 엄마의 얼굴은 숨이 막힐 듯 창백해 보였다.

입술은 바짝 마르고, 걸음은 휘청였다. 아이의 손엔 오렌지 맛 뽀로로 주스가 들려 있었고 웬일인지 평상시와는 다르게 칭얼대고 있었다. 계단이 좁아 동시에 두 사람이 오르내릴 수가 없어 2층 여자에게 먼저 가라 양보하고 밑에서 기다리던 터였다. 그때 갑자기 유모차를 들고 올라가던 여자가 발을 살짝 헛디뎠고 심하게 휘청거렸다. 가까스로 계단난간을 붙잡은 여자는 다행히 밑으로 구르진 않았다. 하지만 계단난간에서 기괴한 삐걱-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오히려 그 것에 놀라던 참이었다.

은영은 2층 아이도 놀라진 않았을까 돌아다보았는데 의외로 아이는 그 순간 칭얼거림을 멈추고 가만히 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것 같지도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다운 반응은 없었고 다만 익숙한 듯 조용했을 뿐이었다. 윤우라면 분명 깜짝 놀라 '엄마 괜찮아? 하고 소리치며 울먹거렸을 텐데.

이 층집 그 아이는 너무 작고 말간 얼굴로 그 모든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은영은 괜찮냐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신경질이 난 듯한 이층 여자의 얼굴을 얼핏 보고는 괜히 들고 있던 장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는 척을 하며 말없이 여자를 지나쳐 집을 향해 올라갔다.


2층 남편은 주말이나 공휴일에만 오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아빠가 올 때마다 현관문 앞까지 뛰어나가 “아빠 왔다!” 하고 크게 외쳤고 그 소리는 위층 은영의 집까지 울렸기 때문에 그 집 아빠가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짐작할 수 있는 것들. 가끔 오는 2층 남편, 좁은 집,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집 차, 그리고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초록색에 남색 테두리를 두른 꽤 유명한 영어유치원 가방.

그저 단편적 사실들만으로 은영은 그 집 사정을 제멋대로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 의문과 상상들은 멈추지 않고 제멋대로 몸집을 불려 나갔다.

남의 집 사정에 그렇게나 궁금증이 발동했다는 것도 은영에게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계단을 다시 올라가며 은영은 다시 그런 것들을 떠올렸다. 누군가 묻지 않아도 계속 생각나는 것들.

왜 그토록 2층이 궁금한 것일까 생각해 보아도 딱히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어느새 집 안에 들어오자 그 시답잖은 궁금증들도 이내 대문 너머로 사라졌다.

은영은 부엌 싱크대 위에 장바구니를 올려두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골반이 조금 뻐근했다.

은영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네 시. 윤우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었다.

짧은 숨을 돌린 뒤, 서둘러 냉장고 안에 장본 것을 들여다 놓고 다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은영은 현관문을 나서기 전 무의식적으로 대문에 달린 렌즈를 통해 복도를 한 번 훑고 대문을 열었다.

여름 오후의 열기가 벽에 눌어붙은 채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 듯했고 복도는 이글거리며 고요했다.

계단을 내려가 2층에 다다르자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 집 앞을 지나야 했다.

별일 아니면서도 괜히 조심스러웠다. 문이 열려 있거나 아이가 나와 있으면 어쩌지.

그게 뭐라고. 그렇지만 은영은 시선을 두기 어려워하며 조용히 발끝을 죽여 그 집 앞을 지나쳤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뜨겁고 축축한 공기가 온몸에 난 숨구멍과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달라붙었다.

오토바이 한 대가 좁은 길을 지나가며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고 사람들은 그늘 쪽을 따라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은영도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길게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어느새 어린이집 앞이었다.

“엄마—” 아이가 달려 나왔다. 은영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되짚어 걷는 동안 아이는 일과시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었지만, 은영의 귀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아이의 체온이 이상하게 뜨겁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복도 끝에 서 있던 2층여자와 그 아이가 떠올랐다.

꼭 이렇게 작겠지. 작고 말 없고, 손 하나만 잡히면 어디든 끌려갈 것 같은 그 2층 아이.

은영은 윤우의 손을 쥔 채 그 집 앞을 지나쳤던 아까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문은 닫혀 있었고 복도는 조용했는데도 왠지 그 안쪽에서 누군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인사, 그림자처럼 엄마에게 늘 붙어 걷던 아이, 계단을 오르던 여자의 위태롭고 야윈 하얀 손목. 그 모든 게 자꾸 마음에 머무르고 있었다.

은영은 윤우의 손을 한 번 더 꼭 잡았다.

그리고 잡고 있는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을 놓쳐 버려서 휘청거리지 않도록 그렇게 꼭 쥐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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