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력서를 쓴다.

망망한 들판에 찾아 온 봄같은 마음으로

by 다윈이야기


경력사항 : ................!!!...


드디어 찾아낸 카페에 집중하고 앉았다.

힘들게 온 만큼, 이력서는 여기서 끝내고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호되게 겪었던 지난날 구직 구걸의 시절들...

몸이 고스란히 그 고통을 기억한다.

멀고 먼 타향까지 와서 다시 이력서를 써보겠다고 앉으니, 한없이 쪼그라든 자존감과 스멀스멀 스며드는 불안함이 밀려든다.


'이렇다 내세울 게 없는데, 괜찮을까. 진즉에 준비 좀 더 해뒀어야 했는데. 안될 것 같은데...'

와르르 쏟아지는 '아직 부족한' 내가, 금세 나를 부수어 무너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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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하반기, 다음 해 상반기...

고배를 마실 때마다 '제발', '한 곳만이라도' 합격하면 이제 끝이다, 앞으로 다시는_

절대로, 절대로 자기 소개서니 이력 서니, 시험, 논술, 그 지긋지긋한 면접...

몇 차례나 피 말리는 이 몹쓸 상황들과 이별하는 거라고,

그러니 다시 힘내 보자며 마음 달랬던 내가_


모두 까막 하게 잊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다시 또 그때와 같은 심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웠다 썼다 결국 제자리인 너른 여백, 어느덧 반밖에 남지 않은 노트북 배터리를 보며_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쓰라리게 들이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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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했으니, 이미 여기서부터 나의 삶은 순탄치 않을 것임을_ 모르지는 않았다.

대학생활 내내, 아니 그 이후 몇 년 더_ 동아리에서부터 시작한 연극에 미쳐 있었다. 이 얼마나 '아무도 가지 않을 길'인지...

할 말이 없다. 보통의 인생, 일반적인 삶과는 더 견고한 담을 쌓은 것 같다.

꽤 열심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회사란 걸 가지 않겠다'라고 철없는 소리를 내뱉어댈 정도로_

순수했고, 단순한 데다,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꿈이 확실하니, 나머지 것들은 다 의미 없다고 맹목적으로 믿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외면해 온 '삶'은 어느 날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열심히 돈 버는 친구들, 이상한 짓이나 하는 자식이 눈엣가시가 돼버린 부모님, 함께 그리는 미래가 버거워 서로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 남자 친구.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무거워진 마음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게 아니면 죽을 것 같고, 한 번도 다른 삶을 생각해 본 적도 부러워한 적도, 돌아보지도 않았던 내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들었던 연극배우 선배의 말에 흔들렸다.


"이런 시대에 연극을 하면서 산다는 건, 가난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야."


희망, 노력, 열정만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앞으로 전혀 나아지지 않을 확률이 더 크고, 계속해서 훨씬 더 힘들어진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여야 할 때, 괴로운 만큼 동시에 냉정해졌다.




다른 길을 걸었기에 전혀 경쟁력 없고 이미 많이 늦었지만_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후 한참 동안, 그리고 너를 처음 만났던 날까지_ 나에게는 꿈이란 게 없었다.

되고 싶은 것, 사랑하는 것, 잘할 수 있고 더 잘 해내고 싶은 것.

그걸 잃고 텅 빈 인간이었던 채로 너를 만났다.

내 열정을 사랑해주는 사람, 모자란 나 같은 인간이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걸 나보다 더 믿어주는 사람.

위대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 내가 만족할 만큼 최고가 되고 싶다는 꿈은_

서로 마주 보는_ 우리의 꿈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다시 나 혼자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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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참 산만한 삶, 정신없는 길들을 헤맸다.

뭐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게 없고, 이 나이 먹도록 딱히 이루어 놓은 게 없다니... 정말 보기 좋게 한심하다.

그럼에도 한동안은, 어쩌면 조금 더_ 헤맬 것 같다.


계속해서 헤맨다고 해도, 보다 열심히 헤매어 보자.


'외길을 걷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보통사람은 꼭 그렇지도 않은 법.

헤매고 실수하고 멀리 돌아가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뒤를 돌아보라.

여기저기 부딪히고, 이리저리 헤맨 너의 길은 분명 그 누구보다 넓을 테니까.'

어디선가, 누군가의 대사였던 것 같은 이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나 넓은 길을 걸어온 나.

이렇게나 넓은 땅덩어리에 나 하나쯤 받아줄_ 마음 넓은 사장님 한 명쯤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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