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왕과 사는 남자>에 열광하는가

with 유시민 작가님의 견해

by 카도

역사적 사료에 한 줄,

그리고 또 한 줄.

그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온 상상력을 동원하면

사실적 배경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한다.


나는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한다.

<왕의 남자>, <관상>, <광해> 등이 그러했고,

아직도 여전히 멈출지 모르고 달리고 있는

<왕과 사는 남자>도 그러하다.


감독인 장항준 감독도 말했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은 몰랐다.

그저 명절 특수를 노리고 나온

가족과 함께 보기 좋은 그런 훈훈한 영화일 줄 알았다.


물론 그런 영화이기도 하다.

아내와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설 연휴에 영화관에서 보면서

아니나 다를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 와서는 단종과 관련된 온갖 유튜브는 다 찾아봤다.

하다하다 <벌거벗은 한국사> 책까지 읽어버렸다.

평소에는 지지리도 책을 안 읽으면서 말이다.

역사를 알수록 더 가엾게 느껴졌고,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누적 관객 1200만을 앞두고 있고,

여전히 화력이 죽지 않은 <왕과 사는 남자>는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그런데 왜?

분명 우리나라 영화 시장이 좋지 않다고 했다.

영화 평론가들에게 예술적 점수를 높게 받진 못했다.

유해진의 연기 차력쇼로 느껴지기도 했고,

클리셰 범벅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왕과 사는 남자>에 환호하고

단종을 그리워하며, 세조를 미워하게 됐을까.

이 간단한 질문을 명쾌하게 해결해준 영상을 우연히 만나게 됐다.

바로 9년 전 <알쓸신잡2 - 영월편>에서의

유시민 작가님 생각이었다.




세조로 감정 이입을 해보자면,

'저 어린 왕이 대신들한테 휘둘려 가지고

외척과 합작하고, 왕권을 무력화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트릴 위험이 있다.

내가 이것을 막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으리라고 봐요.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 왕이 되고 나서

한 모든 행위를 보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을 했어요.


그럼 세조의 문제는 뭘까?

이게 일반화된 철학적 질문으로 올려보면

"목적이 정당하다면 옳지 않은 수단을 써도 되는가?"

라는 우리가 노상 살면서 부딪히는

인생 철학의 문제로 귀결되는 거예요.


사람들의 대답은 '안 된다'예요.


지금 우리들 마음 속에

단종과 세조가 자리 잡고 있는 양상을 보면

단종의 모든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단종이 유뱃길을 왔던 모든 지점마다,

물을 마셨던 곳, 앉아서 쉬었던 곳,

무슨 선물을 받았던 곳, 죽은 곳,

이 모든 단종과 관련되어 있는 이야기가 있는 장소들이

기억되어 왔고요, 몇백년 동안.


그리고 세조가 움직인 곳에 대해서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이게 뭐냐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단종을 기억하고

세조를 잊어버리는 것은

세조의 진위를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옳지 않은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에 대한 단죄예요.


단종은 아무런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 사람이지만

부당한, 나쁜 방법의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추모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일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거라고 봐요.


단종과 관련된 단종의 유뱃길, 단종의 무슨 장소,

이런 걸 볼 때마다 이 장소들이,

이 장소가 특정한 이름이 붙어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사람들이 오늘날도 그걸 찾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 뭘 의미하는 걸까?'라고 말할 때


'세조처럼 살면 안 된다'


<알쓸신잡2 - 영월편> 中




그렇다.

우린 단종에게 아무 것도 받은 게 없지만

알지 못할 부채감을 갖고 있다.

이 부채감이란

부정한 과정으로 인해 희생된 누군가를 바라볼 때

자연스레 생기는 도덕적 불편함일 것이다.


그 희생양이 나였을 수도,

혹은 내 가족이 됐을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생각들.

빚진 듯 애잔한 마음이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단종이 즉위했던 조선 초기의 인구는

1000만명이 못 됐을 거라고 추정한다.

누군가의 말을 빌려 보자면,

이 영화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어린 왕을 추모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우리는 관객으로 들어가 백성으로 나오게 되었으며,

우리가 단종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여준 영화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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