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 최초 본격 판소리 성장소설(단편/완결)
생존신고 합니다!
<옥비녀와 회초리>
오호라, 흡사 전하여지는 옛 그림 같아라!
조선 중기의 한양, 태조로부터 이어져 대궐의 위용은 번성하고, 13대 임금 이환(李峘)의 치세는 평탄하도다. 바야흐로 무르익은 봄날은 이제 막 그 푸르름을 머금어 한층 눈부시구나.
이른 아침 사대문으로 펼쳐진 한양의 풍광은 그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었구나. 힘차게 솟아오른 태양은 높은 하늘에 정갈히 자리하였으며, 사대문 안을 오가는 발걸음의 물결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구나.
하얗게 빛나는 햇살 아래 펼쳐진 한 폭의 산수화 같은 경관을 내려 보고 있노라면, 사대문 안의 낮고 반짝이는 기왓장들이 흡사 노래를 부르듯 점점이 흩어져 저마다 흥을 이루며 봄날 속에 자리하고 있도다.
고요하되 분주한 도성 한양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큰 강 위쪽에 자리한 김 진사의 커다란 기와집은 오늘도 너울너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따스한 봄내음을 가득 품고 있도다. 담벼락 위로 어질어질 피어오르는 햇살의 기운을 타고 나풀거리는 나비 한 쌍이 팔랑거리는 노오란 날갯짓으로 담장 너머의 온기를 탐하노니, 가히 이 봄의 춤꾼이라 일컬어 부족함이 없노라.
나비의 자취를 따라 담장 안쪽, 김 진사 네 별당이 시야에 닿도다. 별당은 다른 이가 아닌 혼인 전 그 댁 큰 규수 치선이 기거하는 공간이거니와, 사대부 가문의 위상에 걸맞게 정성스레 단장되어 있도다. 빛깔 고운 대청은 단아한 문창살을 통해 고운 햇살을 품고, 고풍스러운 나뭇결은 일하는 이들의 손길로 빛나도다. 실내는 처소의 주인의 성품을 드러내듯 정갈하기 이를 데 없나니, 사대부 가문의 단정한 품위를 다시 말하여 무엇하랴. 발아래 대청의 바람결이 실내를 감싸니, 봄을 품은 아지랑이와 어디 다를 바 없는 기품 넘치는 순간이로다.
발밑의 화사한 꽃망울이 터트리는 봄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유독 그 대청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만은 엄중함에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나니. 치선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아우를 목청을 높이지 않고도 대번에 압도하였도다. 여린 손마디에 들린 자작나무 회초리가 봄날의 햇살 아래 은빛처럼 빛나며 제법 묵직해 보이니, 열다섯 어린 도령은 그 앞에서 예를 다하여 꿇어앉아 귀를 낮추며 말없음을 이어가니 가히 엄한 가문의 일상이 이러하다 할지어다.
그 어린 도령의 복색이 또한 고풍스럽기 이를 데 없나니, 그의 신분을 가늠할 수 있도다. 그의 웃옷은 엷은 베색이라 여덕이 가볍게 흐르며, 그 아래 덧입은 괘자는 흰색을 바탕으로 정갈하게 매무새가 티 하나 없구나. 허리에는 염초로 매듭지은 가느다란 띠가 우아하게 배어 있고, 발에는 흰색 버선을 신고 복건 차림새로 단정하게 대청 위에 좌한다.
꿇어앉은 어린 도령 치열의 얼굴은 격앙과 애원의 기운을 감추지 못한 반면, 누이인 치선의 기색은 여느 때 없이 차고 단단하기만 하니, 이는 어떠한 사정일지, 좀 더 살펴볼 일이로다.
아아, 경건한 교육과 단아한 기풍으로 하나 된 이 사대부집의 봄날을 보라. 그 차가운 엄함 속에서 늘 훈훈히 감도는 훈육의 향기가 오늘도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지나니, 참으로 은은한 사대부 가문의 율격이 찬란히 빛을 발하는 듯도 하구나!
[서막]
(북장단 둥둥, 느리게)
아, 아– 여보게들! 이것 좀 들어보소!
조선 어느 사대부 댁에서 벌어지는 이야긴 디,
벗님네들이여, 내가 한 번 들려줄 텐가?
큰 누이인 치선 소저의 혼인을 앞두고 전해지는 어린 아우 치열 도령의 서글프고도 아리따운 사연이라오.
(장단이 휘몰아치듯 빨라지며)
한 손엔 회초리 든 엄한 듯 다정한 누이 치선과, 꿇어앉은 도령 치열이 오늘의 그 주인공이라!
[첫 마당 – 누이의 엄격함]
(북이 천천히 두드려짐)
열다섯 도령 치열은 꿇어앉아, 사랑채 마루 앞에 기댔더라.
맵시 한 번 좋구나, 도령의 옷차림! 푸른 도포가 종아리 위로 흘러내리고,
그 아래 버선 발끝조차 단정하여라.
(장단 느려지며)
오호라,
그 겸상 위엔 차가운 기운이 넘실대는즉…!
곤란하구나, 그 앞엔 누님 치선, 자작나무 회초리를 손에 쥔 채!
회초리 한 번 묵직하더라, 한 번 휘젓기만 하면 바람결마저 두려워 후루룩 멀리 달아나리라.
“아이고, 누이여, 오늘만 봐주시지요!”
어린 도령이 겨우 대엿 대 맞고 엎어져 두 손을 비비적거리며 애원을 하네.
가엾고도 애처로운 모습에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심금을 울리네. 허나 그 댁 큰 규수 얼굴엔 싸늘한 북풍한설이 잔뜩 끼었으니, 이를 어이할 것인가.
큰 규수, 눈 한 번 꿈쩍도 않고 이르되,
말이 차갑기로는 만주 벌판의 겨울 삭풍 못지않구나.
“추후 나랏일을 도모하여야 할 장부가 고작 얄팍한 나무 회초리는 다섯 대조차 이기지 못하고 눈물 바람이니, 뭇사람들이 우리 가문을 얼마나 업신여길 것이냐. 지나가는 계집종들도 웃어넘길 일이니, 집안을 망신케 하는 네게 더 큰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겠구나. 엎어져 돌아 앉아, 도포자락을 위로 걷어라. 다 맞을 때까지 다시금 손을 대면, 내 너를 반드시 이 집에서 내치고 말리라!”
(북소리 “덩 떨어덩” 울림)
아, 도령의 가슴은 북소리를 뒤덮을 만큼 쿵쿵 뛰노는구나.
어찌할 수 없이 돌아앉아 엉덩이를 덮은 도포 자락을 허리께로 걷어 올리는 치열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어라.
나의 누이여,
북풍한설 마냥 매서운 말만큼 차라리 그대가 매몰찬 이였다면,
나를 향한 누이의 눈빛에 떠오른 아픈 애정을 이 어리석은 아우가
읽어낼 수 없었다면, 나는 차라리 좋겠소.
치선의 회초리가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어린 도령의 엉덩이 위로 작열하더라.
“아이쿠...!”
“엄살 피우지 말거라!”
“흐, 으욱…!”
어린 도령은 울음이 차오르는 입술을 짓씹으며 내심으로 이리 덧붙이더라.
아시오?
누이가 정녕 따스한 사람이라,
나는 이 매질이 더욱 아프다오.
진사 댁 별당에는 차마 건네지 못할 마음 대신 매질 소리만 자욱하더라.
[두 번째 마당 – 치선의 결혼 소식]
(느린 진양조로 시작)
아니, 이 무슨 가엾고도 애달픈 일인가!
하늘엔 북두의 찬란한 별이 총총하고,
발밑엔 숲 속 개울 물소리가 졸졸 울리는데,
어린 도령 치열의 가슴은 가마솥처럼 끓고만 있으니.
김진사 댁 큰 규수 치선의 혼담이 오갔다 하니,
아, 그 도령
세상이 멈추는 듯 숨이 턱 막히는구나.
(장단 점점 높아짐)
누이는 나의 하늘이었고,
누이는 나의 길이었으며,
누이는 나의 배움이자 어미 같은 분이었소!
한 번도 그리웠다 말해 본 적 없이 그저 당연한 존재였거늘.
금일의 이 소식이 어찌 이리 미치도록 이내 마음을 쥐고 흔든단 말이오.
(중모리로 빠르게 전환)
절망에 빠진 도령의 눈에 서책인들 들어오랴.
바람같이 사랑방으로 가자 하니, 큰 누이의 혼담을 내 귀로 확인하겠다는데,
발이 급하면 마음은 더욱 조급하기만 하구나!
문턱을 채 넘기도 전에, 급자기 철천지원수가 나타나는구나.
이는 김진사 댁 작은 규수 치연이로다.
“어이쿠야 망했구나.”
서탁 위에 어지러이 내팽개친 서책들이 떠오르며 도령의 눈앞이 캄캄해지는구나!
치연이 큰 누이에게 고해바칠 터인데.
그 도령 가슴이 북소리만치나 쿵쿵 울리는데…! 이 어찌 안타깝지 아니할까.
(장단이 느려졌다가 다시 고조됨)
겁을 먹은 도령을 붙잡더니, 작은 누이, 웅얼웅얼 이르되,
“큰 누이가, 이 달 초파일에 혼인하신다 하더이다!”
이 무슨 섬광 같은 말이냐, 어린 도령의 귀엔 청천벽력이 따로 없구나!
한숨 한 번에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가슴 먹먹한 말끝이 울리며, 온 세상이 캄캄, 돌아선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구나.
(자진모리로 빠르게 변함)
아니, 아니, 어찌할 수 없다더니, 어찌 이 마음을 주체하겠소?
누이도 없는데, 이내 몸이 무엇으로 사는가?
산 아래 소나무도 눈물 흘리고,
작은 등을 밝히던 등불도 바람을 맞아 흔들리니,
그 모든 것, 내 마음 같아 울고만 있는 것이로다!
(대목 끝맺음에서 탄탄하게 적당히 느린 장단으로 마무리)
아, 금일이야말로 모두가 변하는 날이구나!
누이는 떠나지만, 나는 누이의 가르침을 품어 걷는다, 걷는다.
스승 같은 누이는 떠나고,
나는 나만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겠다,
가슴의 아픔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나,
판소리 장단 딱 맞춰, 내 인생의 북을 울리며 나가리라.
(북이 마지막 한 번, 쿵!)
[세 번째 마당 – 옥비녀를 사는 아우]
(음률 낮아지며)
어느 날 저물녘, 회초리에 맞아 따끔한 종아리를 부여잡은 도령,
아픔을 참고 곰곰이 궁리하네.
‘누이가 혼례 날 무얼 갖게 할꺼나.’
실로 애달프고도 아리따운 동기간의 정이 아니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어린 도령 결국 엽전을 움켜쥐고 저잣길로 향하였지,
“한 쌍 옥비녀요!” 외친 도령의 어린 목소리가
저잣거리에 안타까이 울리더라.
(빠르게)
허나 집에 돌아온 길엔 갑작스레, 초롱 불빛 든 치선의 그림자가… 오호라!
“어이하여 또 나갔더냐! 눈길만 떼어내면 도무지 자리를 지키지 못하니, 네 가벼운 엉덩이를 매우 쳐야겠구나!”
노여움 섞인 지청구와 함께 휘두른 회초리여,
아아아- 통재라,
눈물 많은 도령, 끝끝내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보더라.
또르륵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애달프게 아롱져 매를 치는 치선의 치맛자락을 적시니,
애재라, 보는 이의 마음조차 문드러지니 이를 어이할 손가!
(다시 느려지며)
눈물로 매를 삼키던 그 도령, 이리저리 내리쳐진 회초리에 비단 옷깃이 뜯기고, 드러난 사지가 온통 울긋불긋 변한 이후에야 흐느끼듯 고하며, 품 안에 소중히 품고 있던 필낭을 치선에게 내밀더라. 비단 주머니 속, 밝게 빛나는 고아한 빛깔의 옥비녀가, 달빛 아래 곱기도 하여라.
“누이, 그 옥비녀… 혼례 날 꽂으시라고 사 왔소. …어리석은 아우의 마음이오.”
(장단 가파르게 고조되며)
아아! 그 말을 들은 치선,
떨리는 손으로 울고 있는 아우를 번쩍 끌어안고서
“이 천치 같은 것아, 그걸 어찌하여 말도 못 하고 혼자 끌어안고 이 고생이더냐….”
구슬프게 흐느껴 울더라.
[네 번째 마당 – 혼례 날 아침]
(장구 장단 고조되며 시작)
오호라, 이 날이 큰 날이라!
사대부의 집안, 김진사 댁에 해가 떠오르고, 햇살은 구름 사이로 살포시 내려앉아 대청마루를 은빛으로 물들이누나!
혼례 날 아침이 밝았도다.
아! 온 집안이 흥성하고, 마당에는 마치 큰 장터라도 선 듯 수많은 이가 북적이네. 저 만개한 꽃의 길목을 따라, 오색의 꽃가루 흩날리는구나!
(장구소리 잦아들며 가야금 소리 어우러짐)
대청마루 정갈하게 놓인 혼례상의 격조 있는 모습, 보이느냐?
저기 상서로운 기운이 깃드니, 천지신명이 내려오신다 하지 않는가!
푸른 비단 저고리, 붉은 치마 한 겹 덧댄 치선의 단아한 자태! 아아, 누구라 여기 눈 가지 않고 지나치리오! 고운 화관을 머리에 얹고, 청아한 옥비녀 하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구나. 이 어찌 고결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라 아니하리.
(피리 소리 은은히 울려 퍼진다)
“오호, 이리 와 보소, 이리 보소!”
하인들과 친척들은 목소리를 잃고 외치누나.
“곱기도 하구나, 참말로 선녀가 강림한 듯하구나!”
온 마을 사람들이 발 구르며 환호하더라. 치선은 나긋나긋 미소 지으며, 속마음의 두려운 떨림을 애써 감추누나.
북소리 그윽하게 울리고, 장구 장단 맞추어 경쾌히 치네.
‘천지신명께 우러러 맹세하나니, 이제 두 집안이 하나가 되는 혼례일세이다!’
대청마루에서 시작된 정화수례, 치선이 고운 손을 모아 물을 떠올리고, 최참판 집안의 아들도 그 앞에 손 모아 팔을 낮추는구나.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찰나!
이야, 이렇게도 아름답던가!
온 세상은 멈춘 듯, 둘만의 시간이 흐르고, 절을 올리는 순간, 이들이 하나로 맺어졌도다.
꽃가루 나부끼고, 종소리 은은하게 퍼지며, 피리는 속삭이고 장구는 뛰어오른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구나!”
양가의 일가붙이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외치네. 치선의 손에 잡힌 그 따스한 온기, 그녀의 가슴까지 퍼져나가더라.
첩첩 산길도 이들 앞에서는 축복의 길이라, 아니더냐!
그러나, 오호, 멀찍이 홀로 선 어린 도령을 보라. 치열의 눈 속에 눈물이 반쯤 고이더니만, 그토록 사랑했던 누이가 이제 떠나감을 온몸으로 느끼는구나.
“누이, 나를 떠나지 마오….”
혀끝까지 치미는 그 소리 삼키니 절절한 통한만이 깊어질 뿐이로다.
(북소리 잦아들며 피리의 낮은음 운영)
치선의 깊어진 미소 속, 그네 또한 두려움과 환희를 오가는 설렘의 길목에 서 있구나. 저만치 들려오는 도령의 목소리가 바람 따라 스쳐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네.
다만 마음속 외치되, ‘잘 살아야 하리라. 잘 살아야 하리라!’
흥겨운 가락이 온 마당을 울리고, 그날의 찬란한 아침을 결코 잊을 수 없게 하리라!
금일의 경사, 다 함께 노래하세!
사랑의 긴 길도, 풍경도 맞춰갈 일이로다!
(마무리되며 북소리 느려지고 강한 장구로 마지막 외침)
아아, 치선과 치열의 연은 하늘도 울고 땅도 웃는구나! 이 날의 혼례가 어디라 이어질지, 다음마저 너희 누구라도 흐뭇하게 빛나게 될 일이니라!
(장단 멎으며 고요히 끝난다.)
[끝 마당]
"아우야."
치선의 마지막 건넨 말은 그녀의 성정만치나 곧기 이를 데 없나니.
“이 누이가 너를 위한 마음 한 조각 예에 두고 갈 것인즉. 이제 홀로서도 반듯하게 서야 한다. ”
(북소리 멈추고 낮은음)
누이 없이 내 그 말을 어찌 지키리오, 어린 도령의 심정은 슬픔으로 부풀어 오르나니
본시 정애란, 떠남 속의 아픔을 함께 품으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어린 도령 치열은 이제 홀로 서기를 배워야 하며,
그리움 속에서도 누이 치선의 따스함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리.
(북소리 강렬하게 울림)
아, 아! 그런 슬픔 속에서도, 봄날 김진사 댁의 사랑채와 혼인마당이여!
우리네 가슴속에 애달픈 가락 하나 남기고, 이만 소리판을 마칠까 하노라.
-끝-